새로운 남북관계를 소망하며

2020.05.18 03:00 입력 2020.05.18 03:01 수정

국제정치적 문서들이 다 그렇듯 남북기본합의서도 상황의 산물이다. 냉전 종식으로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가 무너졌으며 중국도 등을 돌린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국면을 타개하고자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 서명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방향을 급선회했다. 외부의 지원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정동칼럼]새로운 남북관계를 소망하며

지금의 안보상황은 30년 전 남북기본합의서 서명 당시와 많이 다르다. 중국의 국력이 급격하게 상승하며 예상하지 못했던 미·중 패권경쟁이 진행되고 있다. 고난의 길을 겪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었다. 국제정치무대에서 핵보유국은 단순한 군사강국의 범주를 뛰어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제력만으로는 핵보유국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상쇄하기 어렵다. 중장기적으로 동북아 및 남북관계에서 역학관계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현재 진행 중인 경제위기는 그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시대가 규정한 남북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당연한 원칙을 되새길 때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항상적 안보불안에 허덕이며 손해를 감수해야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의 패러다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하는 타성 때문이다.

남북 상호관계의 성격은 주변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과 북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서명되던 때와 달리 우리는 어떤 방식의 통일도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통일엔 무력통일과 평화통일이 있다. 무력통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남한이 핵을 가진 북한을 무력 통일할 수 없고, 북한도 남한을 무력 통일할 수 없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나, 오랫동안 6·25전쟁과 같은 전면 남침에 필요한 재래식 군사력 건설을 하지 못했다. 한·미 군사 당국은 오래전부터 북한이 전면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평가해왔다. 제3차 세계대전을 무릅쓰고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할 리도 없다.

상당 기간 평화통일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국력이 강해지면 북한이 스스로 숙이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해 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본질적으론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겉으론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시간이 가면 결국 국력이 약한 북한이 자연스럽게 붕괴될 것이라 기대했다. 북한이 김대중 정권과 이후 진보정권의 대북화해협력 정책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한을 흡수통일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대북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자폐적 행태다. 흡수통일을 제외한 또 다른 평화통일의 방법은 남과 북이 서로 합의로 투표를 해서 단일정권을 만드는 것이다.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없다. 결국 지금의 상황에서 남과 북이 통일을 이뤄낼 방도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이 민족의 지상명제라는 것을 부정해선 안 된다. 그러나 통일이 염원과 기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통일과 평화는 사실상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평화가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일을 추구하면 전쟁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순차적 접근이 필요하다. 평화의 제도화를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남과 북이 지금의 어정쩡한 관계에서 벗어나 국가와 국가 간의 안정적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70년 넘게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정상이라 할 수 없다.

지금의 남북관계가 잘해보자는 의지만으로 풀리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생각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문제다. 구한말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도움과 간섭을 받아왔다. 이제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의존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때, 숙명처럼 여겼던 한반도의 전략적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내부적 환경도 달라졌다. 역대 어떤 정부도 지금처럼 좋은 여건을 누리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 남북교류협력과 같은 기술적 측면보다 상호관계 재규정과 같은 근본적 문제를 다뤄야 할 것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