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대북 피로증후군

2000.10.30 19:08

〈고영신·논설위원〉

우리 국민들 사이에 북한에 대해 부담스럽고 짜증스럽게 여기는 대북(對北) 피로현상이 급격히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과 환희, 파격적인 행보로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던 김정일(金正日)쇼크가 벌써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느낌이다. 지금 같아서는 설사 내년 봄 김국방위원장의 방남(訪南)이 성사되더라도 얼만큼 환영분위기가 일어날지조차 의문이다.

주가폭락, 금융불안 등 우리도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판에 남한을 봉으로 여기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북한을 도와줄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남북관계 진전에 매달린 결과 얻은 것은 노벨평화상이고 잃은 것은 민심이라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대북 피로증이 예상보다 조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차적으로는 경제난의 여파로 대북지원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여론이지만 국민들의 실망을 자아낸 북측의 일방적인 대화 자세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북 피로증을 심화시킨 가장 큰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미덥지 못한 정부의 태도이다. 정상회담 이후 추진하고 있는 일련의 대북정책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탓이다. 북측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저자세 정책은 정부의 해명대로 북한의 자존심을 감안, 형식은 양보하되 실질적인 성과에 역점을 둔 때문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뭔가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소득이 있어야 하는 데 소리만 요란했지 실속이 없었다.

게다가 식량 지원, 경의선 복원사업 등과 같은 교류·협력 사업이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 위에 추진되지 못함으로써 불신을 사고 있다. 이 때문에 이면합의설이 나오는 등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주고 있다.

대북정책 관련 고위 당국자들의 잦은 말실수가 겹쳐 이같은 의구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남북간 교류·협력 사업의 추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공개,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보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는 양 호도하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정부의 나홀로 대북정책 못지 않게 민족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남북문제조차 반DJ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우리 사회 일각의 편향된 시각도 문제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지역갈등이 이념갈등으로 비화되는 듯한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 일부 수구세력과 정치권이 대국적인 차원에서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지원하기보다 딴지걸기식 비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 가열되고 있는 6·15 공동선언 2항의 통일방안을 둘러싼 논란도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딴지걸기성 논쟁에 불과하다. 북측이 제안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안고 있는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은 백번 옳은 얘기이다. 그러나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측의 연합제안에 대한 공통성 인정이 통일방안이나 통일국가의 상(像)에 대한 합의는 아니다. 제도적 통일을 뒤로 미루고 상호체제 인정과 평화공존, 화해 협력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가자는 통일에 접근하는 방식에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권과 보수인사들이 마치 정부가 북측의 적화통일 전략에 손을 들어 준 것처럼 몰아가면서 소모적 논쟁을 벌이는 속셈이 무엇인가.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연방제하면 붉은색으로 덧칠해 북의 적화통일전략으로 몰아붙이는 낡은 냉전적 사고는 이제 청산할 때가 됐다.

북한은 55년간 닫힌 빗장을 풀고 겨우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은 북측이 체제붕괴의 임계점을 벗어났다는 나름의 자신감 속에 탈냉전의 국제질서에 적극 편입하겠다는 의지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우선 조급증을 버리고 남북 모두 이익이 되고 합의가 가능한 공통분모를 늘려 나가면서 느긋하게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여유와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가 허겁지겁 추진해온 대북정책의 방향과 원칙을 재점검하고 협상자세를 재정립,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는 대북 피로증을 차단하고 순조로운 남북관계 발전의 롱런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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