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재편과 영국 노동당

2016.01.04 20:47 입력 2016.01.04 20:51 수정

안철수에 이어 김한길까지 탈당함으로써 제1야당의 분열이 현실화했다. 20대 총선까지 남은 100일 사이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지만 여러 야당이 경쟁하는 구도로 총선이 치러질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짱돌’과 같은 한 표(paper stone)로 오만한 권력을 심판하라지만 시민들의 열의는 그렇지 않다. 야당 연대가 불투명한 현재 시점으로 봤을 때 야당과 후보들은 각자도생의 생존법으로 내몰리고 있다. 유능하지도 않고 소통도 거부하는, 게다가 청렴과도 거리가 먼 박근혜 정부 3년에 대한 심판이 선거의 쟁점이 되지 못하고, 야당의 이합집산이 관심사가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유권자들이 알아서 여권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된 이 상황이 절망스럽다.

[경향의 눈] 야권 재편과 영국 노동당

요새 총선 이야기가 늘 화제에 오르지만 총선보다 그 이후에 주목한다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소소한 생활정치 참여를 다짐하기도 하고, 촛불을 말하는 사람도 꽤 있다. 그중 백기완 선생의 말씀이 새해 벽두 내 머리를 때렸다. 백 선생은 “야당이나 야권에 사람과 조직이 없는 게 아니다. 없는 것은 야권의 지도부, 그리고 지도노선”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없었지만 뜻은 짐작이 간다.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신당, 정의당, 복지당, 노동조합 등 제 정당과 세력을 하나의 깃발 아래로 아우르라는 뜻으로 ‘지도부’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리저리 좋다는 정책을 다 모아놓은 것만으로는 새 판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을 ‘지도노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평등을 해소하라는 시대정신과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바랄(소원 또는 희망이라는 뜻으로 백 선생이 쓰는 말)’을 담은 정당이 나와야 한다는 뜻으로 나는 해석했다.

하지만 야권이 뭉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을 우리는 최근 한 달 사이에 목도하고 있다. 뭉치되, 잘 뭉쳐야 한다. 100년 넘게 영국 정치를 이끌고 있는 노동당은 1900년 결성된 노동대표위원회(Labor Representative Committee)를 모태로 한다. 노동대표위원회는 당시 독립노동당과 점진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 사회민주연맹, 노동조합 등이 다함께 뭉친 조직이었다. 소외된 계급과 계층의 정치적 욕구가 높아지면서 이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으로 의회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헬조선’과 ‘흙수저 계급론’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와 흡사한 시대적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 영국 노동당인 셈이다. 노조 내 공산주의자 문제, 세계공황에 대한 대응책 등을 둘러싼 분열로 풍파는 있었지만 2차대전 종전 후 압도적인 승리로 집권, 영국이 자랑하는 사회보장제도 등 복지정책을 실현했다.

놀라운 것은 노동당이 창당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당수로 선출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제러미 코번은 노동당 내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정치인이다. 지금도 그는 주요 기관의 국유화를 주장하고 반전을 외친다. 그가 당수에 선출되면서 집권 가능성이 멀어졌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제3의 길’을 따랐던 노동당 내 우파가 여전히 다수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좌파의 목소리가 유권자들 -적어도 노동당원들-에게 먹힌다는 점을 그들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당 내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독립적으로 표결하는 전통이 부럽다. 이런 전통이 우리에게도 뿌리내렸다면 정책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 당권을 잡기 위해 주류-비주류 싸움을 벌이는 따위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좌파에서 우파까지 광범위하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큰 정당의 틀 안에서 공존하며 수권능력을 국민에게 과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이 당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면 영국 노동당식 야권 재편은 ‘노동 정치’도 강화한다. 노동조합과 정당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대변하면서 ‘노동 없는 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 민주노총, 한국노총과 같은 대규모 노조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개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보정당들이 이 대열에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모순은 극에 달해야 실체가 드러난다. 싸울 일이 있을 때는 끝까지 다 드러내야 해결책이 나온다. 이 점에서 문재인, 안철수, 김한길의 분열은 차라리 잘된 귀결이다. 이들을 뛰어넘는 인물과 세력이 필요하다. 가뜩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박근혜 정권의 집권 연장 가능성에 1.5 보수정당이 출현할 판이다. 호남에 기대는 지역당으로는 어렵다. 이번 생애에서는 망했다고 생각하는 ‘절망 청년’이 41.3%나 되는 세상이라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소시민적인 생각과 정치공학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판을 깨는 발상이 필요하다. 실현 가능성? 그건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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