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항공청법이 드러낸 한국 정치의 민낯

2023.10.03 20:29 입력 2023.10.04 18:48 수정

지난 5월 한국항공우주(KAI) 등을 방문해 항공업계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처음 접한 사실이 많아 적잖이 놀랐다. 조선업이 세계를 이끄는 것처럼 우리 항공산업계도 세계 4위(PwC 평가) 수준의 산업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삼성항공이 바로 그 자리에서 F16 전투기를 조립 생산하는 것을 견학한 이래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이뤄낸 것에 감개무량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들은 기민하게 상황에 대응한다면 향후 30년간 이 분야 산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거기엔 기회요소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국내 기술자들의 현장 기피가 심각했다. 해외 기술자들이라도 들여오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자금도 문제였다. 기술력이 있는데도 자금 부족으로 부도를 경험한 기업도 있었다. 한마디로 민간이 우주산업을 주도하는 뉴스페이스 시대를 맞아 살 것인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 기로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서둘러 항공산업의 갈피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어떨까. 정부와 여당이 올해 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대한 특별법안’이 표류하고 있다. 지난 4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법안이 국회로 넘겨진 후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5개월 남짓 논의가 공전하고 있다. 최근 여야가 안건조정위원회를 열어 뜻을 맞추는 듯하더니 다시 의견차가 커졌다. 여야 간 이견이 만만치 않은 데다 우항청 입지를 놓고 지역 간 경쟁이 가열되면서 기관의 연내 출범은 물 건너갈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하다.

특별법안의 핵심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처럼 우주항공 정책을 범정부적으로 관장할 컨트롤타워로 우항청을 둔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 사항으로, 그 장은 차관급으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추진 방식이 이상하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우주 경쟁 시대를 맞아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과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천명했다. 윤 대통령은 2032년 달에 무인 탐사선을 보내 광물을 채취한다는 ‘미래우주경제 로드맵’도 발표했다. 그래 놓고 내년 예산안에서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보다 16.6% 삭감했다. 윤 대통령이 전 정부 탓을 하며 ‘연구·개발비 카르텔’을 언급한 뒤 5조2000억원의 예산이 날아간 것이다. 달 탐사의 핵심인 차세대 발사체 예산도 줄였다. 가장 첨예하게 반대 의견이 제시되는 것은 우항청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에 두는 체제이다. 과학자들은 그 정도로는 범정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우항청은 항공우주연구원 등 연구기관과 한 몸처럼 움직일 필요가 있는데 이 또한 외면했다. 정부가 ‘규제 본능’을 드러낸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야당도 답답하다. 우항청을 장관급 기구로 격상해 위상을 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구 설립 자체를 못하게 한다는 비판은 피해야 한다. 항공산업의 생태계를 갖춘 경남 사천과 항공우주연구원 등 우주 연구의 중심지인 대전, 로켓 발사기지가 있는 전남 고흥 등 3곳이 우항청 입지를 놓고 경쟁에 나섰다. 서로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역이기주의에 매몰되어서는 곤란하다.

과학기술 진전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의사결정 시간도 짧아졌다. 지금 정부의 가장 큰 무능은 해야 할 일을 제때에 하지 않는 것이다. 연내에 우항청을 띄우지 못하면 심각한 지체 현상이 발생한다. 그 지체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우주 시대로 가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

대전환의 시대를 맞아 노동과 4차산업 발전 등 난제가 가득하다. 21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이런 법안들에 진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야당이 주도하는 사안이 더디 진행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까지 지지부진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여당이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타령이나 하고 있는 탓이다. 야당의 협조를 구하기는커녕 윽박만 지르고 있다. 추석 민심은 내년 총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당도 마뜩지 않지만, 여당의 무능과 도를 넘어선 정치·협치 파괴에 대한 반감이 폭발 직전이다. 말로만 우주 시대로 간다면서 무슨 염치로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손바닥에 ‘왕(王)’자를 새겨놓고 과학을 외친 사람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과학정책을 추진하겠느냐는 비아냥을 입증하는 꼴만은 면해야 하지 않겠나.

이중근 논설고문

이중근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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