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사광 가속기, 짓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2020.05.13 20:53
김종훈 논설위원

“방사광 가속기를 쓰고 싶어도 제때 쓸 수가 없습니다. 선정이 되더라도 보통은 6개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2차전지 사업을 하는 모 대기업 수석연구원의 하소연이다. 방사광 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 나오는 빛으로 물질의 구조를 밝혀내는 최첨단 과학장비다. 반도체, 에너지, 신약 등의 신물질·소재, 부품 개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다. 그런데 분석장비가 있어도 제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2차전지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능가할 미래 먹거리 산업이다. 국내 기업들은 중국과 치열한 선점 경쟁을 펼치고 있다. 앞서가기 위해선 더 잘 만들어야 하는데 전지의 구조 분석은 필수 과정이다. 그는 “실험 공간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그마저 전문가가 없으면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지난 2월 열린 ‘대형가속기 공청회’에서도 산업계 불만이 쏟아졌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신청 과정이 너무 길어, 급한 실험은 일본에서 하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발표한 지난해 가속기 산업체 수요 대응은 47%였다. 이 수치에는 이용하고 싶어도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기업 수요는 포함되지 않았다.

[경향의 눈]방사광 가속기, 짓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방사광 가속기는 경북 포항에 3, 4세대 2기가 있다. 국가 자산이지만 포항공대 가속기연구소가 위탁운영하고, 실험 배정은 학계·연구계 모임체인 한국방사광이용자협회가 한다. 협회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물었다. 김재영 총무이사(기초과학연구원 연구위원)는 “가속기 이용자는 매년 3차례 신청을 받아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정한다”며 “산업체를 위한 별도의 긴급과제신청, 전용융합분석 제도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체 이용은 저조하다. 2018년 포항가속기가 실험한 과제는 1637개다. 누가 이용했나 봤더니 대학·연구소가 94.4%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산업체는 1.5%에 불과했다. 타 기관을 통해 실험·분석한 과제를 포함해도 9.6%였다. 김 이사는 “산업체 이용이 낮은 것은 전문 인력이 부족하고, 과제 요구수준이 낮은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심사과정이 길고, 산업체 요구를 즉시 수용할 만큼 실험시간을 내주기 힘든 여건도 있다”고 했다.

지난 8일 다목적 방사광 가속기 신축 부지로 충북 청주가 결정됐다.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는 9조원이 넘고, 늘어날 일자리는 13만여개에 달한다. 이런 경제적 효과 외에 주목되는 것은 가속기의 성능이다. 방사광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노도영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청주 가속기는 극한성능 저장 링(Ultimate Storage Ring)이 될 것”이라며 “이론적으로 가능한 연구의 끝단까지 가려는 가속기”라고 했다.

방사광 가속기 추가 구축 필요성은 수년 전부터 제기돼왔다. 그러나 정부는 중이온가속기가 완공되는 2021년까지는 신규 추진을 않기로 한 바 있다. 1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업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과의 무역전쟁이 시작되면서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경쟁력 강화 요구가 제기됐다. 그래서 추가 구축이 결정됐다. 노 원장은 “너무 서둘러 추진하면서 연구·산업계 요구가 제대로 반영될지 걱정”이라고 했다. 결정 과정에서 “정치권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까지 나온 터다. 정부는 앞으로 있을 예비타당성 심사, 개념·상세 설계 과정에서 이런 우려를 해소 할 방안들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청주 방사광 가속기의 30% 이상을 산업계가 쓰도록 하고, 원하는 기업에 대해선 아예 시설 일부를 직접 설치·운용토록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청주 가속기의 가동은 일러야 2028년부터다. 더욱이 국내 기업 중 가속기 전문 연구인력을 확보한 곳은 손을 꼽을 정도다. 좋은 실험 소재가 있어도, 가속기 이용에 엄두도 못 내는 것이 산업계 현실인 것이다.

지금까지 방사광 가속기는 학계·연구계 중심으로 운영돼왔다. 성과가 작지 않지만, 산업계 요구까지 즉시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의 해소를 위해 정부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기업들도 적극 투자에 나서야겠지만, 더 시급한 것은 운영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전문인력을 양성해 기획·실험·결과 분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지원해야 한다. 산업계의 아이디어와 투자, 연구계의 연구수행능력을 버무려 시너지를 낼, 협업 체계 구축도 시급하다. 이런 일들을 추진·운영할 새로운 거버넌스 구축은 말할 것도 없다. 청주 방사광 가속기가 최첨단 기능을 갖추더라도 지금처럼 운영하다가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반쪽 가속기’에 머물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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