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좌파’

2011.05.01 20:08 입력 2011.05.01 20:09 수정
김봉선 | 정치·국제 에디터

쇼크다. 경기 성남 분당을의 보선 결과는 기존 정치공학의 토대를 허물어트릴 만큼 충격적이다. 내년 총선이나 대선도 그 영향권에 들 수밖에 없는 정치적 사건이다.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부자 동네에서 2008년 총선(45.2%)을 넘는 높은 투표율(49.1%)도 그렇지만 민주당의 첫 승리가 가설이 아닌 현실이라 놀랍다.

[아침을 열며]‘분당 좌파’

차기 대권주자 중 한 명인 민주당 손학규 대표라는 인물론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선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차선의 방책일 뿐 불완전한 제도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선거가 갖고 있는 강점과 매력을 보여줬다. “국민의 뜻을 무겁고, 무섭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이례적 촌평이 많은 것을 함축한다. 보수 언론들이 ‘분당 우파’의 반란 운운하며 벌써 내년 총선과 대선을 우려하고, 개혁·진보 세력이 부활의 전조라도 되는 양 환호작약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필자가 보다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그룹, ‘분당 좌파’의 출현이다.

그 한복판에 30, 40대들이 서 있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이 지역에서 사전 여론조사를 벌여 28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손학규 대표는 30대에서 83.9%, 40대에서 58.5%의 지지를 얻었다. 한겨레의 지적대로 30, 40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조사는 40대를 경계로 한 ‘고여저야’ 현상(고령층은 여당, 젊은층은 야당 지지)도 보여준다. 이미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 감지된 바다. 당시 50, 60대의 투표율은 4년 전 지방선거 때보다 각각 4.1%포인트, 1.6%포인트씩 떨어졌으나 30대는 4%포인트 넘게 증가했고, 40대는 0.4%포인트 주는 데 그쳤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486세대’의 특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개 40대가 되면 보수 성향을 띠지만 이들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고,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 또한 크다. 그만큼 정의와 복지, 평화에 민감하다.

복지·평화 민감 30, 40대 그룹 출현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분단 한국의 현실에서 우파니 좌파니 하는 구분법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다. 좌파는 배제되어야 할 대상, ‘빨갱이’와 동의어로 통용돼 왔다. 기득권이 친일과 친독재라는 자신들의 추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우파를 자처하며 활용해온 낙인이다. 좌파라는 용어가 불편한 이유다. 하지만 좌파란 프랑스 의회에서 보수 성향의 왕당파가 오른쪽에, 진보·개혁적인 공화파가 왼쪽에 각각 앉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진보·개혁과 동의어나 다를 바 없다. 이념적으로 친북이나 종북 즉, ‘좌파=빨갱이’라는 식의 색깔론은 한국적 민주주의만큼이나 작의적이다. 한 보수 언론이 분석했듯이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분당 30, 40대의 선택이 정부가 부유층만 편들고, 독불장군식 정책을 운용한 데 대한 반란이라면 그들은 분명 좌파다.

독일 출신 칼 마르크스가 망명지인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써 내려갈 당시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모순이 집적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의 폐해가 서민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소외시키는 요즘이고 보면 좌파의 부상은 예측가능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97년 IMF(외환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 체제에 투항한 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부터 서민의 소외가 시작됐으나 중산층, 그것도 분당 우파에까지 그 소외를 확산시킨 건 이명박 정권이다. 철학부재와 정책무능으로 인한 사교육비 증가, 전세 대란, 물가고 등이 주범이다. 40대는 대학시절 시위에 나섰든 나서지 않았든 한때 뜨거운 가슴으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고민했던 이들이다.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친기득권층 정책은 이들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웠다. 정권이 중산층이라도 제대로 껴안았더라면 그들은 여전히 안온한 우파로 남았을 것이다.

내년 총선·대선구도 변화의 신호

분당 좌파의 등장은 내년 총선이나 대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구도로 짜여지고, 흘러갈 수 있다는 일종의 신호다. 그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얘기했다. 그들이 이번에 손학규 대표를 지지했다고 해서 총선이나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손 대표가 우연히 변화의 지점에 서 있었을 뿐이다. 현재까지 분명한 것은 이 신호를 민감하게 읽고 소화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총선에서 승리하고, 대선에서 집권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년에 우리는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10년 만의 여야 교체에 버금갈 또 다른 정치사적 변화를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극우 세력에 의해 빨강색으로 덧칠된 ‘좌파’의 신원도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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