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역설

2015.05.10 20:37 입력 2015.05.10 21:32 수정

5월만큼 좋은 계절은 없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아니어도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 시기다. 백화만발의 시간도 잦아들고 바야흐로 푸른 녹음이 온 산하대지를 물들인다. 그래서일까. 5월에는 우리 인간의 삶도 한껏 힘을 받고 바빠진다. 농부들은 입하를 시작으로 소만-망종을 거치면서 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시작한다. 마음이 바빠지는 것은 농부들만이 아니다. 도시민들, 아니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5월에는 마음이 종종걸음을 친다. 좋은 계절만큼이나 새기고 기념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이다. 첫날 1일부터 마지막 31일까지 그야말로 기념일들로 빽빽하다.

[아침을 열며]5월의 역설

근로자의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석가탄신일이 대충 떠오르지만 달력을 꼼꼼히 살펴보면 각종 기념일이 무려 12번이다. 한 달의 절반 가까이가 기념일이니 자고나면 기념일인 셈이다. 기념일을 제정한 뜻은 말하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다. 기념일은 기념해야 할 대상이 가지는 가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이를 실생활에서 실천하자는 다짐의 의미일 것이다. 근로자의날은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는지를 돌아보고 자본에 의해 훼손된 노동의 신성성을 회복하자는 날이다. 어린이날 역시 신체적·정신적으로 약자인 어린이들을 국가와 어른들이 보살펴 건강하게 자라나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 같은 기념일의 뜻은 어버이날(8일), 입양의날(11일), 스승의날(15일), 가정의날(15일), 성년의날(18일), 부부의날(21일) 등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념일 대상 모두에게 적용된다 하겠다.

하지만 매년 5월의 기념일을 맞는 속내가 그리 편치만은 않다. 기념일을 제정한 그 뜻을 뒤집어보면 그 기념일을 통해 우리가 숨기고 가리려 했던 우리 사회의 상실과 결핍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는 기념 대상의 존재가치가 본래가치로부터 왜곡됐거나 우리들의 일상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불편해 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없는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한 채 그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만회하는 날이 어린이날임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고도화된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식들이 1년 내내 저질렀던 불효의 죄스러움을 한 송이 카네이션과 봉투 속 용돈으로 대속하는 날이 바로 어버이날은 아닐까. 과거 그림자마저도 밟기를 꺼렸던 스승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이 땅에 떨어진 오늘, 한국 교단의 슬픈 현실을 역설적으로 대변하는 날이 스승의날이기도 하다. 게다가 부부는 서로를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는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참의미가 무너진 오늘의 부부관계를 상징하는 부부의날, 그런 부부들과 상처받고 아픈 아이들이 꾸려가는 가정의 민낯을 드러내 주는 것이 가정의날인 것이다.

이처럼 5월 속 기념일에는 당연해야 할 것들이 특별해져야 하는 데 대한 상실의 고통이 얽혀 있다. 또 그 당연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과 동시에 그 아픈 현실로부터 비켜서고 싶은 우리 사회의 내밀한 욕망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기념일을 정하고 이름 붙인다 해서 현실이 개선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짓는 순간, 그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이름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는 도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도덕경 1절)라는 경구로 이름짓기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 5월은 예년에 비해 기념일의 허구성과 무가치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의 슬픔과 참혹함은 이미 5월 기념일이 가진 의미 모두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헛되고 헛된 상상이지만 세월호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 아이들은 어린이날에는 엄마 아빠에게 치기 어린 용돈 타령을 했을 수도 있고, 어버이날에는 그 용돈으로 마련한 카네이션을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리며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부끄러운 듯 속삭였을 것이다.

그것뿐일까. 자신들의 성장을 옆에서 거들고 부축했던 선생님들에게 넙죽 엎드려 큰절이라도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내년엔 어엿한 성인이 돼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디리라.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 땅은 악마들의 땅”이라고 절규한 어머니의 울음과 ‘어버이날’ 끝내 목을 매단 아버지의 분노가 아직도 서려 있기에 우리는 눈이 부시게 푸른 5월을 마냥 즐거이 맞이하고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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