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질과 낮잠

2015.05.03 20:47 입력 2015.05.04 17:53 수정

보건당국에 지금껏 단 한번도 신고되지 않은 질병이 퍼지고 있다. 어제오늘 알려진 병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대한민국 리더들에게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 병은 얼핏보면 치매와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많다. 치매는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일부터 차츰 기억에서 지워지지만 이 병은 앞뒤 상황은 모두 생생한데 끼어있는 특정시간만 새까맣게 잊힌다.

[아침을 열며]괴질과 낮잠

특히 자신이 곤경에 처할 수 있는 부분일수록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또 치매는 꾸준히 치료를 받아도 환자의 기억상태는 조금씩 나빠지게 마련이지만 이 병은 딱히 치료를 받지 않아도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활기찬 생활을 한다. 그래서 ‘셀프 건망증’이라는 오해도 받지만 당사자들이 워낙 강력하게 부인하니 환자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 병의 확산을 방치하면 사회적으로 적잖은 부작용을 낳게 되는 만큼 하루빨리 치료약이 개발됐으면 한다. 이 병이 퍼지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수사기관이 확실하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셀프건망증으로 빠져나가려는 ‘나이롱환자’가 많아질 것이다. 범죄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그런 꾀로 풀려난다면 또다시 범법 행위를 이어 갈 것은 명약관화하다. 결국 그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특히 그 같은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에 집중되면 울화증을 앓는 국민은 늘고 이 사회는 불신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만약 치료약이 개발된다면 복용을 권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이완구 전 국무총리다. 그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선거캠프에서 독대하며 3000만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독대한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독대 증언이 연거푸 나오면서 70일 만에 물러났다. 국가 통치 2인자를 지낸 그가 2년 전 그날의 기억을 또렷하게 끄집어내 퇴임사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말한 “결백하다”는 주장이 진실로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얼마 전 출판기념회를 마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도 사드리고 싶다. 그는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허위수사를 지시한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까지 가며 2년여간 검찰과의 법정 다툼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에 맞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긴 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그가 얼마 전 출간한 <나는 왜…>라는 책을 보면 그는 분명 존경받아야 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상 처음으로 청문회 선서를 거부한 행동에 대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왔고, 국민에게 주어진 방어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국정원과 검찰, 경찰, 법원, 정당, 언론, 시민단체의 적폐를 싸잡아 비판했다. 이렇게 용기있는 전직 경찰을 본 적이 없다. 책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김 전 청장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정치권으로 보내드려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주홍글씨처럼 따라 붙는 약점이 있다. 2012년 12월15일 점심 일이다. 이날은 왜곡 논란을 빚은 경찰의 심야 수사결과 발표 하루 전이다. 그래서 이날 점심은 ‘수상한 점심모임’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점심은 오후 5시쯤 식사비 카드결제가 이뤄질 정도로 긴 점심시간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김 전 청장은 15일 저녁과 다음날 아침은 기억했지만 유독 긴 점심시간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치권 인사와는 먹지 않았다”며 특이한 부분망각 증상을 보였다. 자신의 재판 과정과 공직생활 중 업적을 소상하게 써낸 <나는 왜…>라는 책에는 수상한 점심에 대해 자신의 아내와 친지·지인 등 8명이 함께 했다고 짧게 기록했다. 그렇지만 청문회 당시 자신 외 7명은 이 점심에 대해 왜 침묵했는지, 기억을 살리는데 동석했던 아내의 도움은 왜 받지 못했는지 등은 언급돼 있지 않아 의문이 말끔히 해소되기에는 부족하다. 어쨌든 김 전 청장의 심각한‘부분 망각증’은 중책을 맡기에는 우려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주장의 진위 여부를 떠나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할 것 같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상은 그나마 희망적이다. 그는 성완종 파문이 확산될 당시 “비서실장 재임 중 성 전 회장을 만난 적 없다”고 말했다가 얼마지나지 않아 언론 인터뷰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고 자료를 보니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지적하지만 진짜로 그 당시엔 기억이 안 났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앞서 거론된 두 사람과 성완종 리스트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정치인들은 그에게 기억을 되살리는 비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독일의 한 대학연구팀은 낮잠을 1시간가량 자면 기억력이 최대 5배까지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당장 치료약 개발이 어렵다면 급한 대로 국회 청문회장이나 수사기관에 낮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는 방법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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