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커피와 명예박사

2016.10.16 20:45 입력 2016.10.16 20:47 수정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거나 보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상아탑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캠퍼스 내 은밀한 거래로 지적되고 있지 않은가. 정·재계 로비 창구로 변질되고 있는 대학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 얘기다. 최근 여러 해 동안 이 학위는 저명한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 선출직 자치단체장 등이 주로 받고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공로가 충분히 인정되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뇌물·보험성으로 의심되는 학위가 더 많다는 게 중론이다. 국내 명예박사 학위는 본래 정부의 통제를 받고 수여해 왔으나 1993년 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승인 권한이 대학으로 넘어갔다. 이후 대학들은 붕어빵 찍어내듯 명예박사 학위증을 앞다퉈 남발했다. 요즘에는 웬만한 정치인이면 자신의 명예박사 학위 한 장쯤은 집안에 걸어놓고 있을 만큼 명예박사 인플레이션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아침을 열며]캔커피와 명예박사

명예박사는 말 그대로 특별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학위다. 대학이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이 제도를 활용한다면 사회의 순기능으로 역할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47조는 ‘명예박사 학위는 학술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하였거나, 인류 문화의 향상에 특별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 대해 대학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수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결국 논문을 쓰지 않아도, 필요한 과정을 이수하지 않아도 이 학위 수여는 가능하다. 위원회 심의라는 사전 절차가 있긴 하지만 세부적 기준이 모호해 총장이나 이사장의 결정만으로도 학위 수여가 이뤄질 수 있는 구조다. 명예 업그레이드에 목마른 이들에게 필요한 보따리를 건네주고 학교는 그들과 연결되는 고리를 만드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이 가능한 셈이다.

공식 학위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박사’라는 호칭을 손쉽게 얻게 되니 받는 쪽에서는 반길 수밖에 없다. 국가기록원도 역대 대통령들의 국내외 명예박사 학위를 학력란에 빠짐없이 기재해 놓고 있다. 학연과 지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고리는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면 됐지, 결코 마이너스는 되지 않을 것이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종종 충돌사태가 발생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정적 관계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재작년 경북대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려다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준 전 국회의원도 고려대와 전남대에서 각각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들에게 박사 학위를 왜 내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주된 반대 이유였다. 국내 대학들이 1년 동안 주는 명예박사 학위는 평균적으로 180여개에 이르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게 쌓인 국내 명예박사는 현재 5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돈만 주면 명예박사 학위를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 적지 않다. 하지만 청탁금지법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선진 청렴사회에서는 명예박사 학위에 매우 신중하다. 미국의 일부 유명 대학들은 명예박사 학위를 아예 수여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학문적 성과가 없으면 학위 수여자 후보조차 될 수 없다. 핀란드에선 공직자가 이 학위를 받으면 뇌물로 간주된다.

청탁금지법 시행 첫날인 지난달 28일, 서울시립대에서 이 법 시행 이후 국내 대학에선 처음으로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이 치러졌다. 이날 시립대에서는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 헌재소장은 검사 시절 이 대학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은 인연도 있다. 시립대는 “국민의 기본권 신장과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아시아 지역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다”고 수여 이유를 설명했다.

박 헌재소장의 명예박사 학위에 그 자격이나 의도를 의심하곤 싶지 않다. 그럴 근거도 없다. 다만 대한민국 청렴의 상징으로 비치는 헌재소장이 대학 내 부패 논란이 있는 명예박사 학위를 청탁금지법 시행 첫날 굳이 받아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공교롭게도 그날 다른 대학에서 제자가 교수에게 캔커피 한 개를 건네 청탁금지법 위반자로 경찰에 처음 신고된 터라 더더욱 그렇다.

만약 그가 학위를 거부했다면 청탁금지법에 발맞춰 신선한 메시지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국민권익위는 명예박사 학위는 청탁금지법과는 무관하다고 해석했다. 청탁금지법 시행으로 대학의 대내외 활동 등 운신의 폭은 과거에 비해 매우 좁아졌다. 이런저런 안팎의 상황을 따져볼 때 합법으로 인정된 대학들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대책을 고민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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