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2016.10.30 20:39 입력 2016.10.30 20:42 수정

어이없음이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화’도 나지 않는다. ‘너무 황당한 현실’에는 한순간 집단적 ‘멘붕’에 빠지는 현상과도 같다.

[아침을 열며]국민에게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정치는 배신, 경제는 등신, 연설은 순실접신, 국민들은 실신.’

라임 돋는 이 구절은 지난 25일 부산의 한 지하철역에 나붙은 어느 젊은이의 ‘벽서(壁書·전제군주체제에서 민간에 통용되던 글, 대자보)’ 한 부분이다. 소위 ‘최순실 게이트’를 언론을 통해 접하는 국민들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그 젊은이는 말미에 “나라꼴이 무지‘개’ 같아서 감탄중”이라고 자조했다.

청년(미래)들은 절망하고, 사회(현재)는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배신’을 깨달은 마음들은 황량함 그 자체일 터다.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니까 현실감이 안 든다”(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비현실감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국가를 기능하게 할 능력이 없으면 논리적으론 그 자리에 있으면 안된다. 국민들이 지금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말은 딱 하나가 아닌가 싶다. ‘아직도 그 자리에 계세요!’

지난 29일 서울 청계광장에선 아이부터 노인까지 시민 2만여명이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26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하야’ 여론이 42.3%였다는 게 이처럼 상처 입고 ‘분노’한 마음들을 전한다.

분노의 힘은 강하다. 분노에는 자생적 분노와 동원된 분노, 두 종류가 있다. 자생적 분노는 혁명의 초석이 되지만, 동원된 분노는 세상을 파괴한다.

지금 민심의 분노는 단순히 대통령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술적 연기마저 피우는 이의 ‘꼭두각시’였다는 배신감 때문만은 아니다. 본질은 지난 4년 대통령의 ‘이해할 길 없는’ 단말마적 비명 같은 국정 행위들이 이처럼 어이없이 설명된다는 점일 것이다.

국민을 가르고, ‘진박’을 내리꽂으려 집권여당을 파괴하고, ‘통일대박’을 외치다 개성공단 폐쇄라는 극약을 처방해 안보를 위기에 빠트리고, 국회를 질타하던 그 모든 모습들이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의 결정이 아닐 수 있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에 대한 분노다. 대통령은 주술의 꼭두각시였고,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 사회 ‘이성의 곳간’은 이미 바닥난 것이다. 사회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분노와 분노로 부딪쳤지만 실상은 개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동원된 분노’ 위에서 헛춤을 춘 꼭두각시들이었다. 이 같은 ‘흑마술·흑역사’를 가리기 위해 대통령이 지지층을 선동했던 분노와 갈등은 이제 ‘혁명’의 서막과도 같은 자생적 분노로 변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국민들은 마음속에서 ‘정치적 탄핵’을 했지만, 현실에선 야당도 좀체 ‘탄핵·하야’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것은 분노와 별개로 헌정사에 ‘헌정 중단’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남겨서는 안된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국정이 농단되고 국가가 무너진 치욕만으로도 너무도 큰 상처를 입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공동체는 무한하다.’

이제 권력이 결단할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정말 아주 실낱같은 책임감이라도, 애정이라도 남아 있다면 해야 할 일들이다. ‘최순실의 꼭두각시에서 이제 국민의 머슴’으로 돌아오는 선택이다.

우선 우병우 민정수석과 ‘문고리 3인방’ 등 의혹의 ‘측근’들을 모두 냉정하게 정리해 상처 입은 민심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여야 차기 대선주자들이 입을 모아 요구하는 거국 중립내각을 받아 권력과 책임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을 일이다. 행정부는 책임총리 대행으로 흐트러진 국정을 추슬러야 한다. 외교·안보의 책임을 지되 ‘한반도 사드 배치’ 등 의문스러운 그동안의 모든 정책을 멈추고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만 할 일이다.

별도특검이냐, 상설특검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의심없이 납득할 수 있도록 그 모든 주도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우선이다. 어떤 형태 특검이든 실체적 조사가 가능하도록 보장하고 대통령 스스로 자신을 조사해달라고 나서는 길이다.

국민들은 지금 금요일(28일) 밤 청와대 수석 사퇴 지시, 일요일 아침 최순실의 돌연한 귀국 등 급작스러운 대통령과 국정농단 세력의 움직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또 어떤 정략으로 ‘기만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청와대나 새누리당은 7인회 김용갑 전 의원의 “수습 과정에서 이득을 보겠다, 이런 생각을 싹 내려놓아야 한다”는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만 ‘국민 이성’이 헌정 중단만은 되지 않도록 용인해 줄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이 ‘오늘의 내 생각이 옳고 어제 일은 모두 그릇되었음을 깨달았노라’(도연명 ‘귀거래사’)라고 외치는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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