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가 대구에 건네는 위로

2020.03.01 21:16 입력 2020.03.02 16:27 수정

대구에 있는 고교 선생님의 안부가 걱정됐다. “기침 때문에 걱정했지만 감기라네. 괜찮아. 난 고립에 익숙한 편이라….”

[아침을 열며]광주가 대구에 건네는 위로

선생님은 포항에서 교육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뒤 33년 전 고향 대구에 정착했다. 삶의 고통을 잊으려 다시 찾은 고향, 살아내기 위해 겪었던 모든 경험이 고립이었으리라. 선생님은 그때마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를 출발해 황톳길 긴 방죽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잊지 않기 위해.

코로나19가 대구를 휘감고 있다. 2월29일 현재 대구 지역 확진자만 2000명이 넘었다. 선생님의 고립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간 홀로 겪었던 고립을, 이번엔 대구 시민들과 함께 겪고 있다. 선생님은 악몽이라고 했다. 악몽의 실체는 혐오를 따라 창궐하는 정치 바이러스였다. 2월18일 31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후 대구는 공포에 빠졌다. 그즈음, 금도를 넘어선 풍경을 목도했다. 4·15 총선에서 대구 동갑에 출마한 미래통합당 후보가 ‘문재인 폐렴이 대구 시민 다 죽인다’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문재인 폐렴’이란 단어를 보며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한나 아렌트가 재판정에서 본 유대인 학살 전범 아이히만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아이히만은 “나는 맡은 일을 했을 뿐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그로 인해 죄책감 없이 악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통합당 후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이란 걸 했을까. 당선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괜찮다고 확신하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그 후보의 ‘무슨 일’은 대구를 지역주의라는 반동으로 다시 몰고 갔다. 대구는 비합리적 지역주의가 횡행했던 곳이었다. 멀게는 1971년 대선, 가깝게는 1988년 총선 이후 영남 정치인들은 지역민들과의 일체감보다 권력 지향적 지역주의를 고수했다. 그랬던 대구가 20대 총선에서 ‘진박 감별’ 싸움에 빠진 새누리당에 철퇴를 가했다. 정치 1번지 수성갑에선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당선됐다. 대구 시민들은 한 세대 만에 강고했던 ‘비합리적 지역주의’를 무너뜨렸다.

통합당 그 후보는 비합리적 지역주의가 허물어진 자리에 혐오를 끌어왔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특정집단을 낙인찍고 차별할 때 혐오가 중심 작용을 한다”고 했다. 혐오는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희생양은 늘 약자였다. 1차 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고 시민들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쳤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전당포를 하며 고리대금을 걷는 바람에 우리가 어려워졌다”고 선동했다. 내부의 분노를 외부로 투사하는 과정에서 약자(유대인) 혐오를 이용한 것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가 약자는 아니다. 그다음이 문제다. 빨갱이, 지역주의가 안 먹히자 혐오를 대체재로 끌어왔다. 결국 희생양은 대구 시민들이었다. ‘대구 코로나’ ‘대구발 코로나 OO 상륙’이란 몹쓸 말 앞에 상처를 입었고, 노년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바이러스에 쓰러졌다. ‘문재인 폐렴이 대구 시민 다 죽인다’, 혐오 가득한 이 슬로건은 한 세대에 걸친 대구 시민들의 노력 모두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비합리적 지역주의를 부활하고, 혐오를 동원한 것도 부족했던지 통합당 황교안 대표는 대구 지원 예산을 ‘혈세’에 빗댔다. 혈세 낭비로 치면 꼼수 위성정당(미래한국당)에 ‘뺏긴’ 세금만 할까. ‘무슨 말을 해도 TK는 우리를 찍을 것’이라는 오만이자 지지층에 대한 경멸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마감 무렵, 소설가 공지영씨가 2018년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와 코로나19 확진자 현황이 담긴 지도를 공유하며 “투표의 중요성 후덜덜”(원글은 ‘투표 잘하자’)이라고 쓴 글을 봤다. 대구·경북 시민들이 통합당 단체장을 뽑았기 때문에 재난을 겪고 있단 건데. 울리히 백이 위험사회론에서 시사했듯 누구든 정치적 선택 때문에 차별받거나 배제당해선 안된다. 공씨는 진영 논리로 피해자 혐오를 부추기며 스스로 지식인의 책무를 포기했다.

코로나19 공포 속에서 5·18 광주의 고립을 생각했다. 광주 시민들은 1일 대구의 코로나 경증환자들을 격리치료하겠다고 선언하며, 이것이 광주의 길이라고 했다. 혐오의 최대 피해자들이 강자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세력이 혐오를 창궐하는 세력을 이기라는 것, 지금 이 시련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준 기회일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다시 낙동강을 찾을 것이다. 고향 대구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따뜻한 연대를 기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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