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국신문의 ‘속보 신드롬’

2002.04.01 20:28

<장호순/순천향대 교수·신문방송학>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에 하나가 “빨리 빨리”라고 한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속도에 집착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우리는 속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느리고 더딘 사람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잔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급속한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남보다 빨리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력한 사람들로 치부됐다.

우리 사회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조급증에 걸려 있다. 물론 뉴스를 보다 빠르게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의무이다. 얼마나 빨리 전달하느냐에 따라 뉴스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뉴스의 신속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확성이나 공정성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예정’이나 ‘계획’에 불과한 것도 아예 기정사실인 듯 보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차피 신문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비해 신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신문기사를 보고서 “아니, 이런 일이?” 하고 놀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문이 중요하게 다루는 기사는 이미 텔레비전을 통해서 알려진 사실들이다. 따라서 속보경쟁에 몰두하는 신문은 청계천에서 택배 오토바이를 따라잡겠다고 덤비는 화물차 운전기사나 다름이 없다. 오토바이처럼 비좁은 길을 빨리 달리는 것이 신문의 기능은 아니다. 오토바이는 배달할 수 없는 크고 무거운 화물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대형트럭처럼, 조금 늦긴 하지만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정보화시대 신문의 경쟁력이다.

이미 속도경쟁에서 도태되어 멸종위기에 있는 뉴스매체들이 있다. 바로 석간신문이다. 점심나절에 기사를 마감해서 찍어내는 신문으로 텔레비전 저녁 뉴스를 이겨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문들이 조간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 신문들은 발행 시간뿐 아니라 뉴스 제공 방법까지도 바꾸었다. 수많은 뉴스 중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골라 분석과 해설을 곁들인 세밀한 기사에 중점을 두었다. 지난 밤 텔레비전을 통해 접한 뉴스를 독자들이 지면을 통해서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수주일 혹은 수개월이 소요되는 심층기획기사에 많은 투자를 하기도 했다. 텔레비전 뉴스와의 속도 경쟁을 포기하고, 신문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경쟁력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신문은 신기할 정도로 아직도 속보제공 기능에 집착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남들보다 빨리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 남들보다 분석적이고 심층적인 뉴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인 듯하다. 적어도 신속성에 있어서는 다른 신문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심리, “물먹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습기자부터 최고 책임자까지 사로잡고 있다.

이처럼 속보경쟁에 몰두하다 보니 자연 정확성이나 심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취재원에게 사실을 확인할 시간도 부족하고, 현장에 가볼 시간도 없다. 다양한 취재원을 통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뉴스를 다루지도 못한다. 결국 부정확하고 부실한 뉴스가 지면에 넘쳐난다. 이를 독자들이 모를 리 없다. 자연히 신문구독 인구나 구독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해 9·11 테러 사건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뉴스이든지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서 즉시 입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정보화시대 신문이 살아남는 길은 조금 늦더라도 세밀하게 사실을 파악하고, 다양한 취재원들을 활용해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느림의 미학’을 시급하게 깨우쳐야 할 곳이 바로 신문인 것이다. 한국 신문이 조급증에서 회복될 때,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빨리 빨리’ 신드롬도 치유의 기미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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