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에서 오는 차별

2006.03.19 18:35

오늘날 ‘인권’은 중요한 권리로 인정되지만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특히 사회가 점점 다원화되면서 각자가 처한 사회·문화·경제적 조건에 따라 인권의 구성내용이 달라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같은 차이를 다른 성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난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돌이켜보건대 한국여성의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선 아직 개선할 점이 많으며 특히 생활관습에서 만나는 억압과 차별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생활속의 ‘작은 억압’ 그대로-

작년 3월 두 차례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아무개군으로부터 수백만원의 합의금을 받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고소를 취하한 아버지가 있었다. 딸은 아버지가 한 합의는 ‘무효’라며 경찰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검·경은 미성년자 성폭행사건의 경우 부모와 피해자 모두 각각 독립된 고소권이 있는 것으로 보고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이 사건에서 아버지는 딸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딸의 고소권을 자신이 행사했다. 자식은 내 소유물이라는 사고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딸이 겪은 성폭력 범죄에 대한 아버지의 무지이다. 성폭력은 소매치기나 강도를 당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여성에게는 치명적인 범죄다. 성폭력 사건에서 당사자의 고통을 동감하지 않고, 또 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없으며 하물며 돈으로 보상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음으로 최연희 의원 술자리 사건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최의원의 지역구에서 일고 있는 사퇴불가론의 맥락이다. 만일 최의원이 사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지역에서 역할을 크게 하고 있는 사람을 여자 하나로 말미암아 망쳐서는 안 된다” “클린턴도 그랬는데 임기를 마쳤다”(3월9일자 민중의 소리에서)라는 논리라면 바로 이같은 논리로 성폭력, 성희롱이 눈감아졌던 지난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최의원에게 혹독한 잣대를 댈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2005년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 들어온 상담건수가 1,007건이었고 이중 성희롱건이 25.6%였다.)

오래된 관습에서 낳는 이같은 차별만이 아니라도 2006년 현재 여성의 인권은 멍들고 있다. 인권의 개념을 자유권을 넘어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권으로 그 의미를 확장하면 더더욱 그렇다.

빈곤가구 중 여성가장의 비율이 45.8%에 이른다. 전체 여성노동자의 약 70%가 비정규직이며 여성의 저임금노동자 비중이 42%로 남성의 2.7배이다. 과배란을 통한 난자채취 시술의 후유증에 대한 아무런 고지 없이 여성의 난자가 채취되고, 당사자의 동의 없이 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 여성의 몸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성 이주 노동자들은 차별적 임금과 대우,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의 부재, 성산업에의 유인 강요 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약 41.0%가 한국생활 동안 인권침해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열악한 여성인권 개선 시급-

여성 차별 해소를 위한 여러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여성 인권이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오랜 세월 내려왔던 실생활에서의 차별은 그대로이다.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듯 여성노동자와 빈민, 나아가 여성농민의 생존 조건은 점점 열악해지고 있다.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여러 각도에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므로 우선 생활 속에 존재하는 작은 억압 기제들로 인해 타인이 어떻게 고통받는지를 살피는 섬세한 감수성을 기르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예를 들면 여성이 어떨 때 불쾌감을 느끼는지를 소통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남편에게 당신은 어떨 때 불쾌감을 느끼는지 물어봐야 하겠다.

〈권미혁/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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