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무엇이었나

2009.05.01 18:13
진중권 | 중앙대 교수·독어독문학

올 2월에 외신 인터뷰를 네 개나 했다. 그들은 한국의 인터넷 문화가 왜 이렇게 앞서 가는지 알고 싶어했다. 과거에는 외국에서 보던 것을 몇 년 후 한국에서 봤다면, 요즘은 한국에서 보던 것을 몇 년 후 외국에서 보게 된다. 실제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인터넷 인프라를 갖고 있다. 맥루언의 말대로 “미디어는 메시지다”. 발달한 인터넷 문화의 잠재력이 정치적 표현을 얻은 것은 바로 지난해의 촛불집회였다.

낡은 패러다임에 대한 반란

[시론]‘촛불’은 무엇이었나

휴대폰 문자, 카메라폰 영상, 인터넷 토론, 디지털 카메라, 손수제작물(UCC), 와이브로 생중계 등 첨단 정보·기술(IT) 영상기기로 무장한 시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촛불’은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촛불집회 속에 감추어진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현 정권은 정치적 피해의식과 디지털에 대한 무지에서 그저 촛불집회를 폄훼하고 범죄시하는 데 급급하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변모했다. ‘촛불’은 그 변화의 정치적 표현이다. 가령 촛불시위 속에서 국민의 생명권이라는 ‘진지한’ 이슈와 민중 페스티벌이라는 ‘오락적’ 성격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촛불에서 가상의 온라인과 현실의 오프라인이 하나가 되었다. 거리 시위에 1만명이 참여했다면, 인터넷 생중계를 지켜보는 사람의 수는 그 몇 배에 이르렀다. 그것은 그저 방송을 시청하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온라인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적극적 태도였다. “명박산성을 넘게 해달라”는 오프라인 시위대의 요청에 온라인 시위대는 즉각 사이버 공격을 개시하여 청와대 홈페이지를 다운시켰다.

촛불집회는 거대한 온라인 게임이었다. “비옷이 필요하다”는 오프라인의 외침에 온라인은 현장으로 우비를 실은 퀵서비스를 보냈다. 거리로 배달된 김밥에는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전사들이 싸우려면 아이템을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촛불은 ‘역사를 창조한다’는 전통적 정치의식이 아니라, ‘서사를 창작한다’는 디지털 유희정신의 표현이었다.

촛불은 ‘삽질’로 표상되는 현정권의 낡은 산업사회 패러다임에 대한 디지털 반란이었다. 인터넷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서로 반말을 하는 원초적 평등의 공간. 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한 디지털 부족은 삽자루를 들고 나타난 재판 박정희에게 정서적으로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반감을 언어로 분절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영상세대는 그것을 ‘루키즘’의 정서로 표현했다. “2mb, 아, 재수 없어.”

감춰진 시대정신 읽어내야

촛불은 동시에 낡은 산업혁명의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던 진보진영에 대한 반란이기도 했다. 촛불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탑다운의 시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보텀업의 시위였다. 시민들 개개인의 자발성들이 ‘네트워크’로 엮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별자리는 조직문화에 익숙한 낡은 진보진영에도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라는 운동권의 위선적 구호를 촛불은 현실로 실현해 보여주었다. 이를 ‘창발’(emergence)이라 부른다.

촛불이 던지는 메시지란, ‘미래의 경제는 국민 개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창발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 온 국민이 삽질하면 선진국이 된다’는 낡은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촛불에서 시대의 메시지를 읽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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