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무장봉기

2009.11.01 17:56

강대국 정복야욕 맞선 ‘항쟁’ 점화

1839년 10월 영국의 인도 총독 오클랜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카불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호시탐탐 아프간을 넘보던 영국이 본색을 드러낸 순간이다. 영국은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반발하는 아프간 부족 세력을 본격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오늘]1841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무장봉기

아프간 사람들의 불평과 반감은 1841년 가을 극에 달했다. 그해 10월 아프간 부족 지도자와 시민들은 카불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168년 전 오늘, 억압받던 아프간 사람들은 침입자 영국에 맞서 무장봉기했다. 모하메드 아크바르가 이끄는 저항군은 영국 고위 관리와 장교들을 살해했다. 카불의 영국군 주둔지는 순식간에 포위됐다.

기세등등한 무장저항에 영국군은 무력대응을 포기하고 협상 카드를 꺼내들었다. 영국은 아크바르에게 총리에 준하는 지위를 보장하는 대신 영국군의 주둔을 용인해달라는 ‘빅딜’안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뒤로는 아크바르 암살을 추진했다. 암살 계획은 곧 탄로났고 영국측 협상단은 보복 살해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팔다리가 잘린 채 시장에 ‘전시’됐다. 이 사건은 아프간 국민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서구 강대국에 각인시켰다.

영국은 저항군의 요구대로 아프간에서 철수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이 나라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1878년 아프간을 다시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은 3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프간 국민들은 또 다시 맹렬히 저항했고,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영국은 1919년 아프간이 독립할 때까지 계속 내정에 간섭하고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전쟁의 포성이 멎지 않는 아프간의 시련은 19세기에 본격화됐다. 당시 강대국들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아프간이 지정학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아프간을 차지한다는 것은 중앙아시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9세기 초부터 제국주의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간을 놓고 패권을 다퉜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이다. 러시아는 카불 무장봉기 때 지원 병력을 파견했는데, 영국을 견제할 목적이었다. 아프간은 냉전시대에도 강대국 파워 게임에 희생됐고 그 같은 시련의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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