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한반도 분할 점령 선언

2011.09.01 21:15

“미국·소련 38도선 경계로 점령” 발표

1945년 9월2일. 이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해 8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시기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설상가상 소련마저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벼랑 끝에 몰렸다. 일본은 8월10일 연합군에 항복을 통보했다. 그리고 9월2일 일본의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미주리 선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상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한국에 실질적인 광복은 8월15일 찾아왔지만 공식적으로 광복을 확인한 것은 9월2일인 셈이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바로 이날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분할 점령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독립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

[어제의 오늘]1945년 한반도 분할 점령 선언

한반도 분할은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1946년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고,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고 봤다. 얄타회담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8월8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대일전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향해 진격해왔고 한반도 진입은 금세 이뤄졌다. 8월24일 소련 극동방면군은 평양 진입에 성공했다. 소련군이 순식간에 한반도에서 세를 확장하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을 선언하자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국은 다급해졌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다. 당시 미군 주둔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필리핀이었다. 미국 측은 소련이 이미 한반도 동북부를 차지하고 있어 서울, 부산, 인천 등의 주요 도시를 확보하기 위해 38도선 분할을 결정했다. 8월13일 분할 점령안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소련도 즉각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물밑에서 분할 점령에 대한 양측 간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9월8일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은 한반도를 지리적으로 분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냉전 논리에 따라 이념적으로도 한민족을 갈라놓았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는 척 했지만 실상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지도를 펴놓은 채 군사적 편의에 따라 설정된 38선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휴전선으로 바뀐 채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를 갈라놓고 있다.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