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가스라이팅에 비유해서라도 ‘재조정’에 임팩트 주고 싶었다”

2021.04.14 06:00 입력 2021.04.14 08:27 수정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며 한·미 동맹 재조정 필요성, 한반도 정세 전망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하며 한·미 동맹 재조정 필요성, 한반도 정세 전망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김준형 국립외교원장(58)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동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쳤으며, 2012·2017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 외교·안보 자문을 맡았다. 2019년 8월 차관급인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장에 취임했다. 정부 외교·안보 정책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연정라인’(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꼽힌다.

미국과 중국 간 세계 패권을 둘러싼 전략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 후 미국 알래스카에서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처음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양측이 인권, 안보, 무역 등 전방위적으로 부딪친 ‘알래스카 충돌’은 그 상징적 장면이었다. 미·중이 한국을 서로 자기 편으로 당기려 하면서 외교적으로 가장 큰 고민에 빠진 것은 한국이다. 한·미 동맹이라는 기본 틀과 함께 중국을 상대하는 고차원의 방정식을 받아든 셈이다. 절체절명의 시험대에 오른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까.

김준형 국립외교원장(58)은 지난 1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한·미 동맹은 국익을 위해 조정해야 한다. 한·미 동맹 신화에서 깨어나 실용주의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일 군사동맹, 쿼드(중국 견제 위한 미국·일본·호주·인도 안보협의체)를 두고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 미·중 압박 프레임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했다. 한·미 동맹을 절대 원칙으로 여기는 한국 외교의 전통과 결이 달라 보인다.

김 원장은 최근 발간된 저서에서 한·미 동맹을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상황을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하는 학대 행위)에 비유해 논란이 일었다. 한동대 교수 때부터 이런 주장은 했지만 공직자의 발언으로는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는 “임팩트를 원했다. 일개 학자의 발언보다 무게 있게 들리기를 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고 했다. 김 원장은 “남북이 평화적인 공존을 관리하지 않으면 미·중 대결의 가장 큰 활용수단이 된다”면서 “미·중 전략경쟁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은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군사동맹 신화서 벗어나야

‘한·미관계는 자산’이라고 생각
미국과 불편한 관계 피하려다 보니
원하는 것 못 얻어…실용주의 필요
이는 중국편 들자는 것과는 달라

미·중 갈등 상황, 남북의 길

군사 압박 참여하면 한국에 불리
전략경쟁 희생양 되지 않기 위해서
평화공존으로 완충지대 만들어야
내년 북·미 정상회담 이상적 전망

-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조 바이든 대통령도 중국에 강경하다.

“미·중 양국 국민 사이에 상대방을 혐오하는 정서가 있다. 미·중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상대국을 때려야 하는 처지다. 국내 여론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새로운 상황인 것이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폭탄, 화웨이 때리기 등 미·중 양자의 문제로 접근했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동맹국 동의를 얻어서 국제기구에서 중국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 미·중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처지가 곤란해 보인다.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에서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 3일 중국에서 한·중 외교장관 회담이 동시에 열리면서 이런 모습이 두드러졌다.

“모양은 그랬지만 (두 회담에서) 큰 압박은 없었다.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는 아시아에서 중국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틀을 만들겠다는 미국의 쇼잉이었다. 동맹국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미국의 대원칙이었다.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구체적인 압박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중국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문제로 한국을 너무 밀어붙였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중국 편을 들라고 했지만 한국이 중립만 지켜준다면 만족할 것이다.”

- 최근 발간한 저서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에서 한·미 동맹을 가스라이팅에 비유하고 동맹 중독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미 동맹 재조정을 미룰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위 공직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책을 보면,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보다 ‘한·미관계는 자산’이라는 표현을 수십배 더 썼다. 지금의 한·미 동맹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군사동맹의 신화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 하다보니, 우리가 미국과의 딜에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지 못한다. 한·미 동맹도 국익을 위해 조정해야 한다. 한·미 동맹을 신성시하는 데에서 깨어나 실용주의로 가야 한다.”

- 보수에서는 ‘친중’ ‘한·미 동맹을 버리자는 것이냐’고 비판한다.

“중국 편 들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편협한 강대국이 되고 있다. 중국의 지인들에게도 ‘포용성 없이는 세계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미국을 선택하고 중국을 적으로 만들었을 때 경제는 파탄난다. 하나만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미국이지만 아직은 막다른 골목에 온 것은 아니지 않으냐.”

-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지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도 최근 “한국이 미국 편에 서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며 모든 국가와 좋은 관계를 맺는 ‘초월외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보수야당은 현실을 망각한 공상이라고 비판하는데.

“편을 만들고 진영을 만들면 한반도나 동북아 평화가 어렵다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한·미 동맹이나 한·미관계를 깨자는 말이 아니었다.”

- 미·중 전략경쟁 심화가 한반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북한과 중국이 밀착하면서 이런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남북이 평화적인 공존을 관리하지 않으면 미·중 대결의 가장 큰 활용수단이 될 수 있다. 전략경쟁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은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 또 미·중 전략경쟁에서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 프랑스, 캐나다, 호주, 아세안 등과 우리 나름대로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 하지만 북한은 남측에 적대적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열린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무색할 지경이다.

“북한은 한국이 미국을 못 움직였다고 본다. 미국을 못 움직일 바에야 한국을 통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미국이 한 약속이 실천 안 됐으며, 한국이 미국 설득에 실패했다고 북한은 본다.”

- 미국이 약속을 어겼다는데,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선언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약속했다. 하지만 연합훈련은 스케일만 줄었고, 종전선언 약속은 깨졌다. 트럼프는 미국 내에서 ‘북한에 속았다’ ‘종전선언을 하면 미군 철수를 이야기할 것’ 등 비판에 부딪히면서 종전선언을 접었다. 북·미 정상회담 3주 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못 만난 것도 종전선언 약속을 못 지켰기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종전선언을 해줄 수 없다’고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에게 하자, 김 위원장이 만나지 않은 것이다.”

도마에 오른 ‘연정라인’

외교안보 분야 독식한다 비판하지만
강경화·최종문, 외교부서 처음 봐
‘초월외교’ 문정인 이사장은 철학과
자주·친미 구분 때문 ‘라인’ 말 나와

- 북·미관계가 물밑에서 삐걱거리는 와중에 문 대통령은 그해 9월 평양에 갔다.

“북·미 교착을 풀기 위해 간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평양에서 판을 키웠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를 약속하면 미국이 종전선언 외에 제재 일부 완화까지 시행하도록 하는 협상안을 북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미국을 설득하지 못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북한은 (남측 조언대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제안해지만, 트럼프가 바로 차버렸다. 북한은 (미국 측이) 영변 핵시설 폐기가 부족하다고 할 경우에 대비해 플랜B도 가지고 있었다. 플랜B가 핵동결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지만 북한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기회도 없었다. 북한 입장에선 더 이상 한국을 믿을 수 없으며, 트럼프 대통령 들러리만 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 미국이 대북정책 발표를 예고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일했던 바이든 행정부 외교안보 주요 인사들이 오바마 때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다시 꺼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바마 때 전략적 인내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북한이 협상 요구를 안 받아들였고, 한국의 박근혜·이명박 정부가 북한과 협상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인권, 제재 문제 등에 대해 선제적인 양보를 전제로 던질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양보하고 나오길 바라는데 북한으로서도 그렇게 하기 힘들다. 미국은 북한이 전략도발을 안 하면 비판만 하면서 상황을 관리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도 원치 않지만 전략적 인내가 길어질 수 있다.”

- 북쪽의 무력도발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 징후가 포착됐다는 보도가 나온다.

“북한이 올해 말까지 전략도발을 안 할 것 같다. 다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은 도발을 할 것이다. 북한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엄청난 심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국제사회 제재 상황에서 팬데믹까지 덮치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도발이 쉽지 않다. SLBM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판을 깨는 도발은 안 할 것이다. 다만 미국이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경하게 나온다면 여지는 있다고 본다.”

- 미국과 북한이 버틴다면 한국이 중재자로 나설 수밖에 없지만 현재 뚜렷한 수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처럼 오는 7월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 접촉을 성사시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은 북한의 불참 선언으로 허물어졌다.

“북한이 불참 선언을 했지만, 되돌릴 수 없다고 보지 않는다. 현재 정부는 미국을 상대로 북·미 싱가포르 선언을 추인하고, 북한과 가능한 한 빨리 대화에 나서라고 설득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 설득에 성공하고, 그런 미국의 뜻을 북측에 전할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이 신뢰를 회복한다면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도쿄 올림픽이 제2의 평창 동계올림픽이 될 기회는 남아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북·미가 올림픽 후 실무회담으로 접점을 좁히고, 내년 2월 하노이 3주년을 맞아 북·미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 북한 인권 문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유엔 인권결의안 등에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원칙적인 입장에서 인권결의안에 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도 인권이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인권 문제를 어떤 시점에서 이야기하느냐가 중요하다. 대화가 출발한 뒤 어떤 시점에 인권 문제, 일본 납치자 문제도 다루는 방법이 있다. 이걸 (대화의) 입구에 놓으니 북한이 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 2018년 3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같은 달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남·북·미 ‘1.5트랙’(반관반민) 대화에 간사 자격으로 참석하셨다. 당시의 경험을 말씀해달라. 북측의 태도는 어땠는가.

“원래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직전에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이 때문에 주제가 정상회담 논의로 바뀌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은 믿는데 북·미 회담은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했다. 중국은 안 믿는다고 했다. 중국이 강했을 때 우리 민족을 안 괴롭힌 적이 있었느냐고 했다. 제재가 어느 정도 힘드냐고 물으니, 제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 몇 보가 남았는데 계속 밀면 혼자 안 죽는다고 했다.”

- 군부 무력진압 등 미얀마 사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개탄만 할 뿐 별다른 실효적 조치를 못 내놓고 있다.

“민족주의, 각자도생, 미·중 경쟁 속에서 국제기구가 힘이 없어지니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정부가 적극적으로 반독재 편에 서야 한다. (군부의 쿠데타 비판에 소극적인) 중국에 할 말도 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국제연대를 이끌어내야 한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수호의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 현 정부 외교안보 분야에서 ‘연정라인’(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의 독식이 심하다고 야권이 비판한다.

“말이 안 된다. (연대 정외과 출신인)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최종문 1차관은 외교부에 와서 처음 봤다. 문정인 이사장과 친하지만, 문 이사장은 (연대 철학과 출신이고) 연정이 아니다. (보수야당이) 이념의 잣대로 자주·친미를 나누다보니 연정라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한·미 동맹, 가스라이팅에 비유해서라도 ‘재조정’에 임팩트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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