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자문위원의눈]‘4·15 진실게임’

2004.04.01 18:46

‘진실게임’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단순한 오락프로 같지만 전달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출연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진짜라고 우긴다. 그러나 한 사람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다. 가짜들의 외양은 진짜를 방불케 한다. 겉모습뿐 아니라 말솜씨도 그럴싸하다. 표정 연기도 탁월해서 웬만한 사람은 진짜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게임은 시종 웃음 속에서 진행된다. 가짜로 판명된 사람의 도덕성을 질타하는 일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낸다. 진실을 가리는 일이 이렇듯 부담 없는 까닭은 혹시 정답이 틀려도 출연자의 신상이나 시청자의 운명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안 남은 총선도 일종의 진실게임이다. 다만 한 시간 동안의 오락이 아니라 앞으로 4년 동안 국가의 미래가 걸린 게임이라는 점이 다르다. 후보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적격자라고 우긴다. TV프로에서는 초대된 패널들이 진짜를 가려내지만 이 국가적 진실게임의 주체는 바로 유권자다. 가장 진실에 근접한 후보 하나를 가려내는 일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즐거운 축제이자 진지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속는 것도 이젠 이력이 났다’면서 게임의 방관자로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게임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수방관의 결과는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수수방관(袖手傍觀)은 팔짱을 끼고 곁에서 지켜본다는 뜻이고, 속수무책(束手無策)은 손이 묶여 어쩔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손이 묶이기 전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녹화는 다시 하면 되지만 선거는 다시 할 수 없다.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는 가짜들을 두 눈 부릅뜨고 가려내야 한다. ‘제대로 뽑자’라는 구호가 곳곳에 넘치지만 실상 제대로 뽑는 데는 훈련된 안목과 관찰이 필요하다. 김매기를 도우러 나온 사람이 뽑으라는 잡초는 안 뽑고 애꿎게 잘 자란 벼이삭만 걷어낸다면 가을에 수확이 어떻겠는가.

아들이 구독하는 과학 잡지의 이번 달 특집이 ‘인간형 로봇’이다. 부제는 ‘세상을 바꿀 첨단기술의 총아’다. 인간형 로봇은 점점 진화한다. 인간을 대신해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다. 노동을 줄여주고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형’에 불과하다. 외견상 인간과 닮았다 해도 그들의 정체는 인간에 매우 가까운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왜 인간이 아닌가. 부끄러워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기능은 있지만 감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기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인간형 로봇’보다 더 걱정되는 건 ‘로봇형 인간’이다. 우리가 대면한 국회의원 중에 의외로 이런 유형이 많다. 전문성을 내세우지만 그런 정도의 능력이라면 차라리 ‘인간형 로봇’이 더 나을지 모른다. ‘로봇형 인간’들에겐 무엇이 부족한가. 그들에겐 소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도 없다. 국민을 대표하는 자가 방향감각이 없다면 그 나라가 결국 어디로 가겠는가.

이번 총선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 갖춘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았으면 한다. 그 두 가지는 소신과 교양이다.

교양인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지 말 일이다. 이름난 대학을 다녔다고 교양인은 아니다.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 왜 부끄러운지를 아는 사람, 부끄럽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교양인이다. 혹시 교양인(敎養人)을 고향인(故鄕人)으로 잘못 알아듣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자. 이번 4·15 진실게임에서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을 뽑자. 그래야 4년 후에 다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주철환/이화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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