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당신 살아있었구려…’

2000.07.27 23:12

“여보, 살아있었구려. 아들아, 부디 이 애비를 용서해다오…”

북녘에 두고온 처자의 생사를 확인한 27일 한재일씨(82·서울 노원구 월계2동)는 50년 전 생이별한 아내 김순실씨(76)와 아들 영선씨(56)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바닥에 엎드려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더욱이 남동생 재삼씨(69)와 여동생 재실씨(56)까지 만날 수 있다는 희소식을 듣고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남한에서 결혼한 두번째 아내 소복순씨(76)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북한과 남한에 아내를 둔 기구한 인생을 살았지만 내 가족, 내 형제를 얼싸안을 수 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씨는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산송리에서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살 때 결혼한 아내와 4살된 아들을 두었던 그는 1950년 순안기계제작소에서 목공일을 하던중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징용을 피해 홀로 월남했다. 전국을 떠돌며 보따리장사를 하던 피란시절 춥고 배고픈 영혼을 보듬어준 지금의 아내 소씨와 만나 1남1녀를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그는 북녘땅에 남겨둔 가족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수 한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사진 한장 없지만 눈을 감으면 고향땅의 푸른 산하와 가족들의 얼굴이 너무도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년 열두달 고향이 눈에 밟혀 통일될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는 힘든 타향살이에도 틈만나면 통일전망대를 찾아 부모에게 속죄의 절을 올렸다.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행여 북녘 가족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입을 다물어 왔다.

6·15 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자 당장 방북 신청서를 접수한 그는 북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아내와 자식의 이름을 적어내려 가다가 남한의 아내가 괜한 오해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인 소씨는 “북에 계신 분이 당연히 형님이신데 통일이 되면 한 집에서 같이 살자”며 그의 짐을 덜어주었다.

그는 “내가 죽어 남북으로 갈라진 자식들과 친척들이 몰라보면 어쩌나 한이 맺혔었는데 이제는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정유미기자 youm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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