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라운지]열반송·사리 ‘세속 잣대’

2003.04.01 18:58

거창한 열반송(涅槃訟)도 없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말만 남기고 지난달 29일 입적한 8대종정 서암(西庵·1932~2003) 스님의 다비식을 앞두고 역대 고승들의 열반송과 사리에 대해 일반인들의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다.

보통 열반송은 한문으로 된 4행의 한시로 되어 있는데, 스님들은 열반을 얼마 앞두고 써놓거나 몸이 불편할 경우 제자들에게 불러 주어 쓰게 한다.

근대 한국불교의 중시조라 일컬어지는 경허(鏡虛·1849~1913) 스님은 64세가 되던 어느날 열반을 앞둔 몇시간 전 열반송을 쓰고 홀연히 입적했다. ‘마음의 달이 오직 둥금에/그 빛이 모든 것을 삼키다/빛도 없고 빛의 대상도 없으니/다시 또 무엇이 있을꼬(心月孤圓 光呑萬象 光境俱忘 復是何物)’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경허 스님의 제자인 만공(滿空·1871~1946) 스님도 입적하는 당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라는 혼잣말과 함께 홀연히 몸을 바꾸었다.

1993년 입적한 제6~7대 종정 성철(性徹·1912~1993) 스님의 임종게(臨終偈)는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친다/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도다/둥근 수레바퀴 붉은 해를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다’라는 가히 충격적인 열반송을 남겼다.

특히 성철 스님은 생전에 “중노릇 잘했으면 됐지 사리는 무슨 사리냐”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따금 다른 스님들의 다비식 소식을 들으면 제자들에게 “그래, 사리는 얼마나 나왔느냐?”며 사리에 대한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성철 스님조차도 사리에 대해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한 스님은 “솔직히 스님의 다비식을 앞두고 사리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열반을 앞둔 다른 노스님들이 ‘나 죽고 사리 안나오면 어쩌지’ 하고 농담같은 걱정을 하는 모습을 종종 뵈었다”고 했다. 이런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서는 110여과의 사리가 나왔다.

이런 사리에 대한 관심은 고불총림 백양사의 초대 방장이자 조계종 비구종단 종정이었던 만암(曼庵·1875~1957) 스님의 사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만암 스님의 오색영롱한 사리 중 한과를 제주도의 한 사찰로 모셨는데, 이 사리에서 빛이 퍼져 나오면서 증식하여 두 과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같은 사실이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발광(發光)과 증식은 고승들 사리의 특징이다. 또한 해인사 용성(龍城·1864~1940) 스님의 경우에는 생전에 치아 사이에서 사리가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01년에 열반한 혜암 종정의 다비식에서는 86과의 영롱한 사리가 나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사리는 다비가 끝난 후 수습하는데, 첫 사리친견은 직계제자들을 비롯한 몇몇 스님들에게만 허용된다.

그러나 불교계의 한 중진 스님은 사리가 한과도 나오지 않았던 경봉(鏡峰) 스님이나 전강(田岡) 스님의 예를 들면서 “사리의 유무는 스님의 수행이나 도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세속적 흥밋거리일 뿐”이라며 “수행자의 모범을 보이며 열반송도 남기지 않은 서암 스님의 다비식이 사리에 대한 세속적 관심을 끊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무경기자 lmk@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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