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11.0 다시 쓰는 시민 계약

그들만의 ‘사법 왕국’, 불행은 시민의 몫으로

2018.02.02 06:00 입력 2018.02.06 00:37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권력의 시녀 막기 위한 ‘1987 헌법’

30년 지나 자율이 제왕적 권위로

1971년 제1차 사법파동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판사들이 정권의 사법부 탄압에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1년 제1차 사법파동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판사들이 정권의 사법부 탄압에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만들어진 1987년 헌법의 핵심 과제는 독재정권의 재등장을 막는 것이었다. 총칼로 시민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법률가들을 동원했다. 법관들은 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작성한 경찰과 검찰의 공소장에 도장을 찍어 유죄 판결문을 만들어줬다. 사법이 독재를 막기는커녕 연장시키는 역할을 했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사법부는 6월항쟁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중세 사법권력은 국왕권력과 하나였다. 시민혁명을 계기로 분리된 사법권력은 정치권력의 안전핀 역할을 했다. 사법은 정치 부패와 탈선이 정권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사법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피를 흘리는 혁명이 일어난다. 사법의 실패가 희생을 동반하는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1987년 한국이다.

6월항쟁 이후 제정된 현행 헌법은 사법부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다. 대법원 위상도 높아졌다. 대법원 판사를 대법관으로 부르게 하고, 대법원장과 대법관 임기도 5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법원 조직 구성도 계속해서 법률로 정하게 해 법원행정처의 강한 기능을 유지시켰다. 법원이 민주주의를 지켜주리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사법부는 타락한 ‘작은 왕국’이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외국에는 없는 법관 승진과 인사를 이용해 역대 대법원장들은 전국의 판사들을 한 줄로 세웠다. 법관의 재판을 돕기 위한 조직인 행정처는 청와대와 연락하면서 판사들의 동향과 성향을 수집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런 불법행위가 언제부터 얼마나 벌어졌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법원을 장악한 사법관료들이 조사조차도 제대로 못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법이 새로 쓰여야 한다. 법관과 법원만을 위한 더 이상의 자율은 필요하지 않다.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정의롭고 민주적인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길이다.

헌법 조항들은 크게 두 종류, 기본권과 통치구조로 나뉜다. 기본권은 기본적인 인권을 규정한 조항을 가리킨다. 경향신문 신년기획 ‘헌법 11.0’이 1·2부에서 소개한 생명권, 노동권, 교육권 등이다. 통치구조는 국가기구인 입법·행정·사법 등을 정한 것으로 3부에서 다룬다. 통치구조 조항 역시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여서 궁극적인 지향은 기본권과 같다.

▶위법 눈감고 ‘정권 영합’ 판결…권력 좇아 독립 걷어찼다

“우리 사법부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사법권 독립을 확보하는 데 힘써왔습니다. 그 결과 독립에 관한 한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법 60주년이던 2008년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의 발언이다. 1948년 7월17일 헌법이 공포됐다. 헌법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했다. 그런데 이 전 대법원장의 말처럼 법원은 그동안 진정으로 독립을 위해 힘써왔을까, 독립이 부끄럽지 않은 수준일까, 법관이 올곧지 못했던 게 권위주의 탓일까.

돌이켜 보면 한국 사법은 부끄러움의 역사였다. 재판제도는 차라리 식민 지배를 원하게 하는 가혹한 것이었고 독재정권의 속마음을 재빠르게 읽는 비굴한 것이었다.

시민이 피땀으로 성취한 민주화 이후에는 판사가 판사를 통제하는 폐쇄 왕국이 됐다. 이것이 우리 사법의 적나라한 모습이며, 그래서 사법 구성원들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사법 신뢰는 공허하다. 지난 사법 역사는 법관 노력만으로 법관의 독립, 재판의 독립, 이에 따른 시민의 인권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 ‘나쁜 재판’이 일제식민 가속화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재판제도 개혁에 집중했다. 부당한 재판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조선인들이 많은 만큼 이를 개선하면 빠르게 마음을 얻을 것이라 판단했다. “대한제국에는 재판제도가 없다시피 할 정도로 부실하다. 서서히 개량해 조선인 스스로가 감복하게 해야 한다”고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7년 1월 법무보좌관들에게 말한 이유다. 이렇게 일제의 사법개혁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당겨왔다.

1988년 제2차 사법파동 당시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를 밝히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임 정권이 임명한 김 대법원장을 유임시키려 했으나 판사들이 반발하자 철회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8년 제2차 사법파동 당시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를 밝히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임 정권이 임명한 김 대법원장을 유임시키려 했으나 판사들이 반발하자 철회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토는 봉건국가 일본을 입헌주의 국가로 설계한 주인공이다. 1882년부터 유럽 각국을 돌며 국가구조를 연구했고 1883년 귀국해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1885년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1889년 메이지헌법을 공포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이토가 조선의 제도들 가운데 재판에 주목했다. 조선의 재판제도는 부당하고 가혹했으며 민심을 이반시킨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의 최종 목표는 사법기관을 장악해 조선인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재판제도는 당시 중요한 사회문제였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폐정개혁안에서 재판제도 시정을 요구했다. ‘인명을 거리낌 없이 죽인 자는 벨 것’ 등 6개가 사법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해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한 군국기무처 의안에도 ‘재판 없이 함부로 죄벌을 가하지 못할 것’ 등 재판절차 개혁안이 들어있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는 재판권을 가진 지방관들을 겨냥한 것으로 불공정한 재판제도로 고통받던 농민들의 입장을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사법제도를 장악하던 조선의 기득권층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개화파가 갑오개혁을 통해 추진한 재판제도는 사법을 행정에서 분리하고, 절차를 강화한 형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의 신분제에 바탕을 둔 법률과 재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 권력을 회복한 기존 지배층은 새로운 재판제도를 줄줄이 폐기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 법부는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 자리가 있다. (이것이) 천지의 도리이며 바로 개화다”라는 훈령을 각급 재판소에 보냈다.

이토가 재판제도 개혁을 들고 나온 게 이 무렵이다. 1907년 4월 통감 관저에서 열린 시정개선협의회 기록을 보면, 이토는 고문 폐지를 주장한다. 이에 대한제국 법무대신 이하영은 “관대한 취조로는 쉽게 자백하지 않고, 국사범의 경우 고문이 불가피하다. 이들을 단속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토는 대한제국의 반대를 물리치고 같은 해 6월 고문 폐지를 관철시킨다. 그리고 갑오개혁 당시 재판제도 법령들을 살려냈다. 소송 절차와 재판 집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를 확립했다.

■ 사법부의 끝없는 권력 추종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1948년 시작된 사법부는 정권에 굴종하고 영합해 독재를 연장시켰다. 2004~2007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에 참여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판사들이 알아서 정권을 도왔다고 했다.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가 30년 동안 단 한 명의 판사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협박한 일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호소했지만 법대 위의 판사들은 끝내 바짓가랑이 한번 걷어보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든 것은 결국 사법부다.

사법부는 정권의 뜻을 헤아려왔다. 1959년 이승만 정권은 비판적인 논조를 가진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헌법 제정과 동시에 효력이 사라진 군정법령 88호를 근거로 들었다. 대한변협은 “폐지된 법령을 적용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라고 했다. 대법원은 경향신문의 가처분 소송을 들고만 있었다. 사건 접수 5개월 뒤에야 구성되지도 않은 헌법위원회에 88호 적용이 위헌인지 물었다. 그리고 “헌법위 판단이 나오기 전에는 결론을 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4월26일 이승만이 하야하자 이날로 경향신문을 복간시켰다.

군사독재 시절 안전기획부나 보안사의 판사들 뒷조사를 도와온 것도 법원이다. 1984년 9월 강금실 당시 서울지법 남부지원 판사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진 대학생에게 형 면제를 선고했다. 그러자 보안사는 ‘강금실 판사 성향 등 내사보고’라는 문서를 만들었는데, 법원이 작성한 대목이 등장한다. 강금실 변호사는 “재판 직후 정기승 서울형사지법원장이 전화해 재판에 대해 물었고, 배후에는 당연히 행정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행정처는 직원을 통해서도 판사들의 동향을 살폈다고 한다.

사법부는 정권이 원하는 판결을 위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1983년 대법원 1부는 ‘송씨 일가 간첩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했다. 유일한 증거는 자백인데 116일 불법구금으로 받아낸 것이라고 했다. 안기부는 주심 이일규 대법관을 미행하고 집까지 뒤졌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유태흥 대법원장은 정지형 송무국장과 가재환 비서실장 등 법원행정처에 대책을 지시했다. 증거능력 인정방안, 재상고심 특별배당 등의 치밀한 방법이 만들어졌고, 안기부에 전달됐다. 결국 1984년 유죄가 확정됐지만, 2009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

법원은 군사정부가 끝나고도 청와대를 위해 움직였다. 군인에게 협박을 받아 협력해온 것만 아니라 출세를 위해 권력에 손을 내민 셈이다. 1994년 대법관 임명을 앞두고 안기부는 법원행정처와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을 거친 이임수 판사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을 거치며 정부시책에 적극 협조 (중략) 확고한 국가관과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음.)”이라고 안기부는 적었다. 그가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이던 때는 김영삼 정부 시절이다. 보고서가 작성되고 나흘 뒤 이 판사는 대법관에 제청됐다.

■ 판사 사찰하는 사법부

대법원은 정권에 무엇을 주었을까. 법원이 가진 것도, 정권이 바라는 것도 판결뿐이다. 이를 위해 판사들을 사찰하고 정권이 원하는 대로 판결할 판사들을 주요한 재판부에 배치해왔다고 적잖은 판사들이 의심한다. 이렇게 행정처가 조직적으로 법관의 독립을 파괴해온 사실이 2017년에야 드러났다. 판사들 뒷조사 문건을 관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모 판사가 불법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17년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뒷조사를 했다는 의혹이 한창이던 가운데 양승태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있다. 양 대법원장 당시 조사위원회는 뒷조사 파일이 없다고 했으나 이후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7년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뒷조사를 했다는 의혹이 한창이던 가운데 양승태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있다. 양 대법원장 당시 조사위원회는 뒷조사 파일이 없다고 했으나 이후 추가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대처는 판사 뒷조사가 행정처 일부그룹이 저지른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지난해 3월 언론 보도 직후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행정처는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전국의 법관을 상대로 글을 올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구성한 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조사위는 “정식의 확인 없이 해명글을 게시한 것으로 은폐 목적이라고 볼 수 없다”며 무마하고 말았다.

지난달 추가조사위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 동향’이라는 행정처 문건을 공개하자 대법관들이 보인 반응도 마찬가지다. 행정처는 원세훈 항소심 재판부의 동향을 꾸준히 파악했지만, 그럼에도 유죄가 선고되자 대법원 차원의 대책을 논의했다는 것이 문건 내용이다. 실제로 대법원은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의 요구대로 전원합의체에 보냈고 전원일치로 파기했다. 그렇지만 대법관들은 상황을 설명하거나 사죄하기는커녕 “사법부의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에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한다”고 집단 성명을 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조사위는 판사 뒷조사 문제를 왜곡하기도 했다. 이인복 조사위원장은 지난해 “전체 판사들 동향을 조사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할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어떠한 정황도 찾아볼 수 없었음”이라고 발표했다. 블랙리스트를 ‘전체 판사들 동향 조사’라고 정의한 다음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한 것이다.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식이다.

행정처 판사들을 불법에 동원한 대법원의 수단은 외국에는 없는 승진제도다. 경향신문이 이용훈·양승태 대법원장 시절(2005년 9월~2017년 9월) 행정처에 근무한 전·현직 판사 456명(연인원)을 전수 조사한 결과, 행정처 출신 판사 100%가 대법관 후보군인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로 승진했다. 전체 판사의 15%만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치다. “100% 승진이라는 확실한 유인책을 통해 판사들을 조종하고 행정처 업무가 재판보다 어렵고 우월하게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판사들은 설명한다.

도움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정재황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참고문헌

도면회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 문준영 <법원과 검찰의 탄생>, 한홍구 <사법부>, 新藤宗幸 <司法官僚>, 사법정책연구원 <각국의 법관 다양화에 관한 연구>, US Dept of State Bureau of International Info Programs 〈Outline of the US Legal System〉

특별취재팀 =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임아영·김경학·김한솔 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