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관여하는...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2021.05.11 06:00 입력 2021.07.27 09:55 수정
장영은

아룬다티 로이

1996년 첫 소설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인도의 작가이자 시민활동가 아룬다티 로이. 지난해에는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시 은평구 제공

1996년 첫 소설인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인도의 작가이자 시민활동가 아룬다티 로이. 지난해에는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시 은평구 제공

“확실히 인도는 발전했지만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그 발전과 무관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누가 우리 자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이 나라는 어떤 종류의 나라인가?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누가 운영하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아룬다티 로이는 1961년 인도의 메갈라야 살롱에서 태어났다. 1963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로이는 외가인 케랄라로 이주하게 된다. 케랄라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적 신념이 공존하는 사회였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했다. 계급 갈등도 심했다. 그곳에서 찻잎을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했던 어머니 메리 로이는 기독교 상속법 개정을 위해 법정 투쟁을 벌였다. 메리 로이는 결국 케랄라의 기독교 집안 여성들이 부모의 재산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다. 케랄라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페미니스트 어머니는 딸의 선택을 무조건 믿고 존중했다. 학교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아룬다티 로이는 10세가 될 때까지 집에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1971년이 되어서야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1977년에는 델리의 건축설계학교에 입학했지만, 커리큘럼에 크게 실망했다. 로이는 건축 설계를 중단하고, 글쓰기에 매달렸다. 건축에는 별다른 미련이 없었지만, 생계를 해결할 길이 딱히 없었다. 델리의 빈민가에서 넝마주이 일을 하거나 에어로빅 강사로 근근이 살다가 1984년 국립도시계획연구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로이는 영화감독 프라디프 크리셴을 만났다. 그가 연출한 <매시 사히브>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시나리오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94년 강간을 영화적 장치로 사용하며 실존 인물 풀란 데비를 난도질하다시피 한 <밴디트 퀸>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인도 영화계를 향해 재현의 윤리를 갖출 것을 촉구했다. 로이는 영화 관계자들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큰 설화(舌禍)를 입었다. 소송까지 치러야 했다.

가부장제·계급 갈등·빈부 격차
인도 현실의 고통과 모순에 맞서
“인간이기에 정치에 관여한다”
저항과 글쓰기로 지난한 싸움

로이는 1992년부터 준비 중이었던 소설 집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에 <작은 것들의 신>을 완성한 로이는 런던의 하퍼콜린스로 원고를 보냈다. 문학 담당 편집자 데이비드 고드윈은 <작은 것들의 신>을 단숨에 읽은 후, 곧바로 인도로 향했다. 데이비드 고드윈은 로이를 만나자마자 출판 계약을 체결했다. 로이는 이 과정을 “한 무명작가가 여러 해에 걸쳐 은밀히 자신의 첫 소설을 썼고, 그것이 나중에 40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백만부가 팔렸으며, 부커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는” “ ‘리더스 다이제스트류’의 낡아빠진 이야기”라고 회고했다. “내 은행계좌는 급격히 불어났다.”

로이는 “그 소설을 쓴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한 것이 아님”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 출간 직후부터 1년 가까이 “그 소설과 동반하여 이루어진 세계여행”을 떠났다. 자신의 이야기가 “여러 문화와 언어와 대륙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고무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인기를 누리는 동안 인도 정부는 핵실험을 하고 있었다. 로이는 경악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정부 비판
강을 지키기 위해 댐 건설 반대
국익이란 미명 아래 자행되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핍박 폭로

1974년, 인디라 간디는 ‘미소 짓는 붓다’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로 인도 최초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로이는 인디라 간디가 그때부터 “진짜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인디라 간디의 핵실험은 “인도 정치의 혈관에 독을 주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흘러 또다시 핵실험이 일어나자 로이는 통탄을 금치 못한다. “핵폭탄은 인도 국민을 저버린 지배 계급이 저지른 마지막 배신행위이다.” 인도 사회는 로이의 절규를 외면했다. 1998년 핵개발 책임자로 대중 앞에 등장한 압둘 칼람은 점차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로이의 근심도 나날이 깊어져갔다.

핵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1년 만에 돌아온 델리의 빈부격차는 상상을 초월했다. 부자들의 “담장은 더욱 높아지고”, “음습한 곳에는 어디서나 마치 이처럼 빈민들이 들끓고” 있었다. 환경마저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땅은 썩어가고 있다. 강이 죽고, 숲이 사라지고, 공기는 숨쉬기가 불가능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때부터 로이는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 Mayank Austen Soofi 문학동네 제공

ⓒ Mayank Austen Soofi 문학동네 제공

한때 인도에서 “기괴할 만큼 성공적인 첫 작품을 쓴 작가로 묘사”되었던 작가 로이는 1999년 인도의 핵 개발과 나르마다강 유역의 대규모 댐 건설을 강도 높게 비판한 <생존의 비용>을 출간하면서부터 “괴물 같은 인간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도 망설임은 있었다. “명성이 사라지면 내게 금단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스스로에게 가만히 물어보았다. 로이는 현명했다. “명성이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조건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나를 죽일 것이다. 예의 바르고 깨끗한 방식으로 죽을 때까지 나를 때릴 것이다.” 로이는 자기답게 살기 위해 용기를 낸다.

“내가 나르마다강 유역을 방문한 것은 1999년 3월 말, 대법원이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건설 작업에 내린 중지 명령을 철회하고 달포가량 지난 후였다.” 인도의 “독립투쟁 이래 가장 괄목할 만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하나인 나르마다강을 살리기 위한 풀뿌리 운동조직”은 너무나도 큰 ‘타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진 로이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로이는 강을 지키기 위해 수년 동안 평화롭게, 그러나 끈질기게 싸워온 ‘권력 없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매혹당하고 말았다. “실패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날마다 전장(戰場)에 나가는 사람들”과 로이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는 것을, 죽었을 때에만 죽는 것을 꿈꾸는 것”이 유일한 “꿈”인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로이는 안도했다. “나르마다강 계곡이 한 사람의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돌아왔다.”

먼저 “정부의 비밀문서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자료를 모조리 읽었다”.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이 “소설의 소재로서는 지나치게 품격이 없는 것으로 보여도” 자신이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 “한 정부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 밑에서 어떻게 교묘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망가뜨리고 있는가를 가차 없이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구체적인 숫자를 예시로 들어가며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계획대로라면 나르마다강에는 3200개의 댐이 들어서게 되고, 그 결과 나르마다강과 그 41개의 지류들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가득 들어차 거대한 물의 계단이 이루어지게 된다. (…) 이 개발계획은 그 유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2500만명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고, 강과 주변 전체 생태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도에서 댐 건설 반대는 일종의 금기 사항에 가까웠다.

“댐이 곧 현대 인도의 사원”이라고 외친 네루의 연설은 인도의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인도 사람들에게 대형 댐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옹호되어야 하며,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은 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정작 그 거대한 댐들은 인도 사회에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있었다. 로이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인도의 총 곡물생산에서 대형 댐의 기여도는 ‘겨우 12%’로 추정되며, 농촌 가구의 70% 이상, 빈민 지역의 80% 이상이 “전기 없이” 살고 있었다. 댐 건설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의 수에 대한 기록”은 흔적조차 없었다. 로이는 “인도 국가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인도의 지식인 공동체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절규했다. 로이는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약 4000만명이 댐 건설에 희생되었다고 짐작했다.

기득권 세력에 의한 탄압에도
“나는 작가다, 나는 싸울 것이다”

로이는 작가에게 조심성과 용의주도함은 역사 앞에서 “기실 비겁함이 되고” “일종의 아첨이” 될 뿐이라고 믿었다. 소설가가 후속 작품은 쓰지 않고 정치 에세이에만 몰두하는 활동가로 전락했다고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 앞에서 로이는 당당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사람은 왜 작가로 불리고, 정치 에세이를 쓴 사람은 왜 활동가로 불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작은 것들의 신>은 소설이지만, 내가 쓴 어떤 에세이 못지않게 정치적입니다. 물론 내 에세이들은 논픽션입니다.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을 쓸 권리를 포기했는지요?” 친구들은 로이를 격려하면서도 “꼬투리 잡힐 약점은 없는지” “미납한 세금은 없는지 확인”하라고 충고한다. 로이가 이민을 준비 중이며 조만간 인도를 완전히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나의 임박한 이민에 관한 모든 의혹이나 소문과 반대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로이가 인도를 떠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자, 일부 기득권 세력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그녀를 핍박했다.

1999년에 구자라트 주정부는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로이의 ‘공공의 더 큰 이익’이 법정의 존엄성을 훼손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녀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99년 10월 법원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했다. “아룬다티 로이 씨가 국가의 사법부에 관련하여 혐오스러운 글을 계속 써왔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어떠한 증거도 우리의 눈에 포착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로이는 법원의 경고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신중한 처신”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작가다.” “나는 싸울 것입니다.” 로이는 문학의 존엄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실의 고통과 모순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는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민주주의를 취재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전망하며, 항상 정치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이야기임을 아룬다티 로이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작가로서 옳은 길을 걷고자 최선을 다했다. 로이와 같은 생각이다. 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최인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과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004), <작은 것들의 신>(박찬원 옮김, 문학동네, 2016), <지복의 성자>(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2020)를 읽고 큰 감동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7)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관여하는...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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