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길 잃기’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의 무지개도 함께 피어올랐다

2019.02.27 21:03 입력 2019.02.27 21:05 수정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리베카 솔닛, 이구아수 폭포, 그리고 나

페루 삭사이와만 유적을 천천히 거닐며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든다.  ⓒ이승원

페루 삭사이와만 유적을 천천히 거닐며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든다. ⓒ이승원

길을 잃는다는 것은 시간낭비일까. 조금 모자라고, 자꾸 한눈팔고,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들만이 길을 잃는 것일까. 작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 대한 강연을 하던 중 한 독자가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는 길 잃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지만, 자신은 아직도 길을 잃는다는 것이 뭔가 손해 보는 일 같아 두렵다고. 나는 독자의 두려운 눈빛 속에서, 웬만하면 길 같은 건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싶었던 20대 시절의 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나도 리베카 솔닛 못지않게 길 잃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수백 가지 방법에 대해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 여행 마니아가 되기 전, 인생에서 오직 ‘쭉 가던 길’로만 직진해 오던 나는, 절대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뭔가 술술 잘 풀리지 않는 느낌, ‘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라치면 재빨리 도망쳐 나오고자 안간힘을 썼다. 칭찬받는 길,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길이 아니면 불안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나는 혼자라도, 경비가 부족해도, 시간은 물론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을 때도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길 잃기의 묘미를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 기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멀리 떠나본, 최고의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좌충우돌을 거듭할수록, 더 느릿느릿 에둘러 갈수록 ‘오직 직진만 하는 모범생’은 결코 알 수 없는 생의 눈부신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길 잃기의 아름다움’을 틈만 나면 예찬한다. 여행은, 특히 라틴아메리카 여행처럼 인생의 효율성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머나먼 나라를 향한 떠남의 시간은, 내게 길을 잃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여기서 길 잃기란 단지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버리는 것, 삶의 목적의식을 잊어버리는 것,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것, 이 모두를 포함한다. 이제 나는 길 잃기의 달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길 잃기의 위험을, 일상 속에서도 즐기는 법을 알게 됐다. 소중한 글을 한 편씩 쓸 때마다, 내가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기쁘게 길 잃은 유목민이 되었다. 작문 교재의 ‘개요 짜기’는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할 글쓰기 방법이다. 나는 개요를 짜지 않고, 완벽한 목차도 없이, 매번 조금씩 길을 잃으면서, 때로는 열심히 썼던 글을 한꺼번에 미련 없이 지우면서, 조금씩 새로운 글쓰기를 추구한다. 애초에 머릿속에 짜놓은 계획마저 진짜 목차라기보다는 ‘꼭 고쳐야만 할, 불완전한 이정표’임을 안다. 우리는 길 잃기 자체의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인생이 우리에게 마치 ‘숨은그림찾기’의 리본이나 국자처럼 꼭꼭 숨겨놓은, 작고 올망졸망한 존재들의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여행 마니아가 되기 전, 나는 오직 ‘직진만 하는 모범생’이었다
길을 잃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여행을 통해 길 잃기의 예찬자가 됐다
이번엔 폐허에 가까운 유적지를 둘러보며 새 빛깔의 무지개를 만났다
삶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면 ‘다른 길에 접어들 권리’를 찾아 떠나시라

멕시코시티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할 무렵,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내게 오랫동안 소중했던 꿈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와중에 건강까지 악화되었는데, 라틴아메리카로 떠나기 위해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고는 아예 앓아눕기도 했다. 글을 쓴답시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밤새 끙끙 앓는 날이 지속됐다. 마음 깊은 곳에서 경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넌 지금 길을 잃었구나. 게다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니. 더욱 오래 헤맬 수밖에 없겠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정든 단골 여행지 유럽이 아니라 머나먼 라틴아메리카를 선택한 것도 차라리 더 대차게 길을 잃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인생의 ‘길’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타로점을 봐주는 쿠바 여인들. ⓒ이승원

인생의 ‘길’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타로점을 봐주는 쿠바 여인들. ⓒ이승원

이번 라틴아메리카 여행에는 유난히 ‘폐허’에 가까운 유적지를 향한 여정이 많았다. 훌륭한 유적지로 잘 보존됐지만 사람이 거주하는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마추픽추도, 치첸이트사의 마야 유적도, 페루의 삭사이와만도, 아름다운 폐허에 가까웠다. 나는 그 폐허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잘 보존된 폐허’에 가까운 이 아름다운 유적들이 ‘우리는 최첨단 문명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어떤 날카로운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들의 문명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 했던 옛사람들이 이토록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지배당하고, 이제는 남겨진 유적에 대한 해석조차 어려운, 사라진 문명의 주인공이 되어버리다니.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자연을, 문명을 파괴해야 이 모든 것들이 기나긴 지구의 역사에서는 지극히 짧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의 흔적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 순간 마추픽추와 치첸이트사, 삭사이와만 등 그 아름다운 폐허 위를 명상하듯 거닐며 생각에 잠긴 모든 여행자들이, 내게는 이름 모를 친구처럼 정겹고 반갑게 느껴졌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길을 잃어버린 문명’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미 친구니까. 사라진 문명도, 인생의 길을 잃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라틴아메리카로 떠나온 나도, ‘길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너무도 친근한 동지였다.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에서 한 여행자가 한없이 푸르른 바다와 드넓은 하늘을감상하고 있다. ⓒ이승원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에서 한 여행자가 한없이 푸르른 바다와 드넓은 하늘을감상하고 있다. ⓒ이승원

폐허는 잘 관리된 도시들과 달리 의지와 분석의 대상을 벗어나 있다. 생산과 소비활동 바깥으로 밀려난 공간이기에 우리 인간에게 ‘효율과 계산’을 뛰어넘은 어떤 영감을 불어넣는 곳, 그곳이 폐허의 아름다움이다. 매년 멀리, 더 멀리 떠나는 여행을 꿈꾸면서 나는 아직 그 쓰임이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은 건축물들, 정확한 목적을 특정할 수 없는 구조물들이 지구상에 정말 많다는 것에 놀랐다. 피라미드도, 마추픽추도, 나스카도, 삭사이와만도 정확한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로 남아 있다. 만약 옛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우리가 여전히 피라미드나 나스카 유적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엄청나게 실망하거나 우리의 무지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의 그 ‘심각한 무지’가 또 다른 희망의 열쇠라고 믿는다. ‘문자도 컴퓨터도 없던 시기에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었을까’라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문자나 컴퓨터로는 결코 재단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풍요로운 상상력이 존재했다고 믿는다.

나는 라틴아메리카 기행을 연재하는 동안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곳에 내가 찾는 놀랍고도 특별한 풍경이 설령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매번 떠남 자체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 자신의 뿌리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니 나는 결국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떠났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밀려들 때마다, 글을 쓰기 위해 떠났다. 나는 글쓰기를, 나를 구속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탈출하는 환상특급열차라고 생각했다. 그 기억의 뿌리에는 엄마의 잔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건과 옷가지 몇 개를 싸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가출을 하다가 오분 만에 골목 어귀에서 엄마에게 딱 걸린 일곱 살 꼬마의 기억이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국 떠나지 못했던, 그 모든 떠날 수 없었던 순간들에 대한 저주가 깃들어 있다. 지금은 누군가 나를 가로막는 사람이 없음에도 아직 자유롭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나뿐만 아니라 ‘일’과 ‘시간’에 얽매인 모든 현대인들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데 떠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구아수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무지개. 위키피디아

이구아수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무지개. 위키피디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 양쪽에서 번갈아 바라본 이구아수 폭포는 내게 ‘경계란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해주었다. 장대한 폭포는 단지 국가와 국가만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가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인지 어디가 폭포와 강물이 만나는 지점인지 알 수가 없다. 낙하하는 물의 힘이 워낙 세 자욱한 물보라에 가려 ‘물’과 ‘물 아닌 것’의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무경계의 지대 위에는 기적처럼 찬란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바로 그것이었다. 이구아수 폭포의 장엄함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이로웠지만,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우리 마음의 어디서 무지개가 피어오르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어디서부터가 물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강물과 폭포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자리에서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폭포수는 다만 온 힘을 다해 떨어지고, 여기서는 폭포수였던 것이 저기서는 평범한 강물이 되고, 방금까지는 잔잔한 강물이었던 것이 3초 후에는 엄청난 속력으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된다. 물과 물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까지 물 자신이 스스로를 온 힘을 다해 밀고 나가는 순간,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구아수 폭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우리 삶도 그렇게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곳에서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하게 제 꿈의 빛깔이 피어오르기를 꿈꾸었다.

여행이 시작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가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때로는 슬픔이 가득한 상태로 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여기가 싫어, 도망치고 싶어. 사랑하지만, 사랑해야만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붙드는 건 싫어. 도망칠 거야. 그곳에서 살아볼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는 그토록 징글징글했던 삶이, 나를 아프게 했던 그 모든 인연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다시 오색찬란한 꿈으로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24)‘길 잃기’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의 무지개도 함께 피어올랐다

여행은 내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자리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빛나게 해주는 영혼의 마법이다. 당신에게도 그 아름다운 내면의 무지개가 일상 구석구석에서 피어오르기를. 내 안의 무지개를 발견하는 생의 마법이, 나에게 글쓰기와 여행이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삶을 지탱하는 저마다의 소중한 무지개가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피어오르기를. 인생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길 잃기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의 무지개도 함께 피어올랐다. 나는 길 잃기의 선수다. 나도 한동안 길을 잃는 것을 소름끼치게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길 잃기의 선수라는 것은, 길 잃는 경험을 통해 더 나은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훈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러니 자꾸만 길을 잃는다고 자책하는 당신 또한 용기를 잃지 말기를. 길을 잃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빛깔의 무지개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길을 잃는 것은 뼈아픈 위기이기도 하지만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길을 잃는 모든 순간, 우리는 또 다른 길을 갈망할 기회를 얻는 것이니. 하여 당신이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이번 기회에 더욱 용감하게 ‘다른 길에 접어들 권리’를 찾아 떠나길 바란다. 길을 잃는 모든 순간, 우리는 새로운 권리를 얻는다. 또 다른 길을 찾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권리, 또 다른 길로 접어들 권리, 길이 없다면 마침내 나만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권리를.

그동안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과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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