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우리 안의 야스쿠니 망령 경계해야 국가주의의 낚싯밥 안될 것”

2017.11.03 20:45 입력 2017.11.03 20:54 수정

화가 홍성담과 군산 근대문화유산

<b>1909년 세운 동국사 대웅전을 바라보며</b> 경향신문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홍성담 화백이 지난 10월28일 전북 군산시 동국사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다. 1909년 지어진 동국사는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군산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1909년 세운 동국사 대웅전을 바라보며 경향신문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홍성담 화백이 지난 10월28일 전북 군산시 동국사에서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다. 1909년 지어진 동국사는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군산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원래 저는 광주에서 5월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어요. 1980년 광주에서 문화선전대로 항쟁을 통과했고 10여년을 광주 진상규명 투쟁에 바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주항쟁 연작판화를 70점 그렸습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5월 화가’ 홍성담이라고 그랬어요. 1989년에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으로 구속된 뒤에는 ‘걸개 화가’ 홍성담으로 불렸죠. 요즘은 또 ‘풍자화가’ 홍성담이라고들 합니다. 앞으로는 또 뭐라고 불릴지 모르겠습니다. 5월 연작판화 50점에 새겨진 광주의 현장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이었는데, 황석영씨가 저보다 먼저 광주를 갔다왔어요. 하여튼 원수야, 원수.”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 기획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함께 10월28일 군산을 찾은 홍성담 화백(62)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군산으로 왔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앞서 9월23일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함께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옛 전남도청과 국립5·18민주묘지 등을 찾은 바 있다.

군산이 아니라 광주에 갔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홍 화백은 군산에서도 할 말이 많았다. 2000년대 작업한 그의 야스쿠니 연작이 그와 군산을 잇는 연결고리다. 주지하듯 야스쿠니는 일본 도쿄에 있는 신사다. 도쿄의 일본 신사와 한반도 서해안의 항구도시가 무슨 상관일까. 군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쌀수탈 전초기지였다. 수탈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은행, 세관 등 근대 식민통치 기구가 설치됐다. 지금의 군산시 해망로 앞에는 근대식 격자 도로가 설치돼 있다. 식민지배의 흔적들이 지금은 근대 건축문화의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홍 화백은 2005~2015년까지 ‘야스쿠니의 미망’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총본산인 야스쿠니를 비판하는 연작 17편을 그렸다. 2007년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는 일본 우익들이 몰려와 전시를 방해하기도 했다.

“2005년 무렵 동아시아 전체에 야스쿠니로 대표되는 국가주의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는 걸 자각했어요. 야스쿠니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도 있고,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에도 있습니다. 10년 동안 30여 차례 일본 신사를 답사했어요. 일본 고대사와 일본 철학도 공부했습니다. 야스쿠니 연작은 야스쿠니의 어둡고 습기찬 망령들이 우리의 일상사와 정치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려는 시도였습니다. 지금도 태극기 시위를 하면서 ‘박근혜’를 외치는 군상들을 보면 야스쿠니의 망령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홍 화백은 일제 식민지의 건축적 유산이 남아 있는 도시에서 우리 현대사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는 식민지 국가주의의 유산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홍 화백의 ‘야스쿠니’ 이야기는 동국사에서 시작됐다.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인 동국사는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다. 1909년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 우치다 붓칸이 세운 절이다. 지붕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무거워 보이는 형상이다.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서 발달된 지붕 건축 양식이다. 사찰 뒤에는 대나무숲이 조성돼 있다.

동국사는 일본 신사와 매우 흡사한 형태다. 자세히 보면 신사와 다른 점이 있다. 신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라몬(투구 모양으로 생긴 신사 입구 장식)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에 흰색으로 된 두 가닥 선이 벽에 그려져 있고, 선의 좌우에는 구름 문양이 있다. 홍 화백은 “입구를 만드는 데 드는 돈이 신사의 나머지 부분을 만드는 데 드는 돈보다 많다고 한다”며 “동국사를 지을 때 건축비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홍 화백이 ‘70인과의 동행’ 참가단을 가장 먼저 동국사로 안내한 것은 야스쿠니 연작을 작업하면서 알게 된 조선인 출신 가미카제 특공대원 때문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로 참전했던 조선인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경기도 개성 출신인 인재웅이라는 사람입니다. 특공대원으로 선발돼 야스쿠니 부대 소속 오장(하사관)으로 복무하다 1944년 11월29일 필리핀 네그로스섬 시라이 기지에서 출격해 레이테만에서 미군 군함을 향해 돌진해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무살이었습니다. 이 사람 행적을 추적해보니까 군산에 있을 때 일본 절에 가끔 들렀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당시 군산에 일본식 사찰은 동국사가 유일했습니다.”

인재웅의 일본 이름은 마쓰이 히데오다. 서정주의 유명한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마쓰이 히데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지자 1944년 12월9일자 매일신보는 서정주의 시를 실었다. 서정주는 시에서 “장하도다/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라며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무훈을 칭송한다. 시에는 또 “수백 척의 비행기와/대포와 폭발탄과/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라는 시구도 등장한다.

<b>야스쿠니 연작 그린 이유를 설명하며</b> 지난 10월28일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함께 전북 군산시 동국사를 찾은 홍성담 화백이 야스쿠니 신사와 국가주의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 화백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소재로 한 ‘야스쿠니의 미망’ 연작을 그렸다. 군산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야스쿠니 연작 그린 이유를 설명하며 지난 10월28일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함께 전북 군산시 동국사를 찾은 홍성담 화백이 야스쿠니 신사와 국가주의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 화백은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0년 동안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소재로 한 ‘야스쿠니의 미망’ 연작을 그렸다. 군산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홍 화백은 종이에 적어온 시를 직접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제가 1980년대에 반미 정서를 담은 수많은 저항시를 읽어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반미시는 못 봤습니다.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서정주를 위해 박수를 보냅시다.(웃음)” 권력 풍자로 일가를 이룬 화가다운, 뼈아픈 농담이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사쿠라(벚꽃) 가지를 흔드는 일본 여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출격했다. ‘전장에서 산화했다’고 할 때 ‘산화(散華)’는 ‘사쿠라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왜 벚꽃이었을까.

“일본에서 천황은 무당입니다. 전쟁터에서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천황이 제례를 올려준다, 얼마나 영광이냐는 논리로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원래 벚꽃은 풍요와 다산, 청춘 같은 긍정적 이미지들의 상징이었어요. 그런데 이 이미지가 죽음과 연결이 됩니다. 3월 말 일본에서 호수에 핀 벚꽃을 보면 현실의 풍경이 아닙니다. 팝콘 튀듯 피었다가 봄바람이 불면 눈처럼 떨어져요. 일본인들은 거기에서 절정의 허무감을 맛보았을 겁니다. 일제는 사쿠라를 죽음의 꽃으로 바꿔놓았어요. 전쟁터에서 죽으면 야스쿠니 뜰에 피는 사쿠라로 환생할 것이라고 주입한 거죠.”

점심 식사 후 참가단은 군산시 해망로 부근을 돌아봤다. 해안과 나란한 방향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옛 군산세관, 옛 조선은행,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옛 미즈상사 건물 등 근대건축물들이 밀집해 있다. 군산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사업비 100억원을 들여 이 부근 일대를 근대문화벨트화지역으로 조성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맞은편 도심 쪽으로 10여분쯤 걸어가면 일본식 가옥들이 나온다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촬영지였던 신흥동 일본식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이 가장 유명하다. 신흥동 가옥은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에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일본인 히로쓰 요시사부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히로쓰 가옥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방 후에는 50년 가까이 호남제분주식회사의 관사로 사용됐다. 신흥동 가옥이 있는 영화동, 신흥동, 월명동 등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밀집지구였다. 일본인들이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조선인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났다. 야스쿠니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홍 화백의 이야기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앞에서 계속됐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일본에서 출간된 책 한권을 보여줬다. 2015년 도쿄에서 출간된 그의 책 <동아시아의 야스쿠니즘>이다. 책에는 야스쿠니 연작 가운데 인재웅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림 속에서 스무살 조선인 청년의 영혼은 쇠사슬에 묶여 고통받고 있다. 홍 화백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게 한 말을 받아서 적었다”며 “‘제발 저를 천황의 군대에서 빼달라’는 절규였다”고 말했다.

“마쓰이 히데오(인재웅) 그림은 제가 2008년에 그린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 이야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2010년에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작성된 미군 문서가 발견됩니다. 미군이 일본인 포로들을 잡아서 포로송환을 했는데 1945년 11월에 마쓰이 히데오가 인천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대로라면 안 죽고 살아 있었다는 겁니다. 미군 군함을 향해 돌진하다가 무서워서 그냥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렸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천황도 속고, 서정주도 속고, 저도 속은 겁니다. 그 뒤의 행적은 알 길이 없습니다.”

인재웅(마쓰이 히데오)의 생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언론인 정운현씨는 2011년 7월 오마이뉴스에 쓴 글에서 1946년 1월10일자 서울신문 기사를 인용해 ‘마쓰이 히데오가 생환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서해문집, 2012)와 같은 관련 서적에는 인재웅이 생환했다는 확증이 없는 것으로 돼 있다. 인재웅의 생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의 국가주의 망령을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가 36년 식민지를 겪으면서 뼛속 깊이 국가주의가 박혔어요. 야스쿠니 연작하면서 필리핀 레이테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만난 필리핀 할아버지가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무서웠다’고 하더군요. 일본인보다 더 용맹해야 한다는 식민지 근성이었던 거죠. 우리 안에 드리워진 야스쿠니의 망령을 조심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야스쿠니 망령 중 한 사람인 박정희가 우리 역사에 남긴 그림자는 그의 딸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주의와 국가폭력의 낚싯밥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64) “우리 안의 야스쿠니 망령 경계해야 국가주의의 낚싯밥 안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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