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시계 멈춘 탄광촌·굴곡진 통리재, 바람을 그림에 넣는 데 30년 걸려…작품도 고독도 시간이 해결하죠

2017.11.10 20:54 입력 2017.11.10 20:56 수정

화가 황재형과 태백 탄광마을

<b>역작 ‘태백에서 동해로’의 배경 통리재에서</b> 지난 4일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이 화가 황재형씨로부터 그의 작품 배경이 된 강원 태백시 통리재에서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태백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역작 ‘태백에서 동해로’의 배경 통리재에서 지난 4일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이 화가 황재형씨로부터 그의 작품 배경이 된 강원 태백시 통리재에서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다. 태백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4일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은 답사단 40여명과 함께 강원 태백을 찾았다. 30년 넘게 태백을 근거지로 광부들의 고단한 삶을 화폭에 담아 온 화가 황재형씨(65)와 함께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통리’, 이제는 흔적만 남은 탄광촌을 돌아보는 여정이었다.

태백은 화전민이 살던 한적한 시골이었다. 태백에 석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석탄 광맥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만들고, 철암에서 묵호까지 철암선을 개통해 석탄을 수탈했다. 1952년 민영탄광인 강원탄광이 문을 열었고, 이때부터 ‘검은 노다지’를 찾아 사람들이 태백으로 몰려들었다.

태백은 한때 탄광촌으로 호황을 누렸지만, 석탄산업이 사양길을 걸으며 사그라졌다. 정부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았고, 일터를 잃은 광부들은 태백을 떠났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만큼 흥청이던 태백은 이젠 폐광의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행선지가 태백이라니, 여행길 치고는 마음이 무거웠다. 단풍철도 지났고, 눈꽃을 보기에도 이르지 않은가.

■ 두문불출 ‘두문동’

막상 버스에 몸을 싣고 충북 제천을 지나 강원 영월의 깊숙한 산골로 들어서니 단풍은 아직 그대로였다. 동행한 가이드의 “내장산 단풍이 부럽지 않으시죠”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울긋불긋 제 모습을 뽐내는 산들을 보고 있자니 집을 나서며 품었던 무거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미세먼지에 찌들어 있던 눈이 말개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처럼 이번 여행의 안내자가 되어준 황재형 작가를 만나기로 한 두문동재에 다다르니 말 그대로 ‘설국’이었다. 새벽 강원 산간에 내린 눈이 만들어낸 눈꽃으로 인해 차창 밖이 온통 하얗다. 일행들의 잔잔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가을이었는데, 이른 아침 길을 나선 ‘70인과의 동행’ 참가자들은 올해 첫눈을 한 달여 앞당겨서 본 셈이 됐다.

<b>탄광마을 두문동에서</b>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화가 황재형씨가 지난 4일 강원 태백시 옛 탄광마을 두문동을 돌아보고 있다. 태백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탄광마을 두문동에서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획 ‘명사 70인과의 동행’ 참가단과 화가 황재형씨가 지난 4일 강원 태백시 옛 탄광마을 두문동을 돌아보고 있다. 태백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두문동재는 강원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 화전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고갯길이다. 두문동재에서 버스에 오른 황씨와 함께 ‘두문동’ 마을로 들어섰다. 황씨는 옛 탄광촌 주택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을 가장 먼저 안내했다. 고려 말 개풍군의 두문동에서 일곱 충신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숨어들어와 두문불출하며 살았던 데서 두문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과 골짜기 틈바구니를 비집고 일렬로 걷는 일행들을 향해 마을 어르신이 “볼 것도 없는 이 촌구석까지 뭣하러 왔냐”며 퉁명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서울 경향신문에서 왔어요.” 한 참가자의 답변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집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붕에는 눈이 쌓여 있으니 영락없는 겨울이었다. 황씨에게 두문동에 얽힌 얘기를 듣느라 잠시 서 있는 동안에도 손이 시렸다.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여러분들이 참 부럽네요. 덕분에 저는 여러분을 직접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요. 이런 만남들이 예술의 신비화, 권위주의를 벗겨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이건희·홍라희 같은 재벌들만 즐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가 예술이지요.”

박수가 나왔다. 황씨는 예술의 대중성을 강조하면서도, 과거 한국의 산업화를 뒷받침한 석탄산업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그는 “태백이 석탄산업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를 뒷받침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면서 “2020년이면 태백의 모든 탄광이 문을 닫는다. 한국에서 채탄을 전혀 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야 하는데, 대책이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버스에 올라 황씨의 작업실로 가는 동안에도 일행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황씨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재형이는 화가를 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했었다는 것부터 형의 여자친구 덕분에 그림 공부를 시작했고, 고흐와 밀레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등의 얘기를 들려줬다.

■ 황재형을 닮은 작업실, 30년간 바람을 기다린 곳 ‘통리재’

“당신은 서울사람이지.… 당신은 몰라. 저녁나절에 앰뷸런스가 울리면 세상이 이렇게 보인다구. 산천초목이 흔들리구, 쥐죽은 듯이 조용하구. 나는 광부생활 20년 하구 이 가겟방 하며 사는데 지금두 이런 때면 소름이 돋아요. 제일 싫다구.”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어느 지물포 아저씨가 황씨의 작품 ‘앰뷸런스’를 보고 “거 참 잘 그렸다”고 한 일화를 전하면서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미학적 척도로 ‘앰뷸런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을 말이다. 앰뷸런스는 앰뷸런스 한 대가 불빛을 밝히며 캄캄한 산길을 지나고 있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황씨는 황지탄광에서 갱도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 김봉춘씨의 작업복을 그린 ‘황지330’(1981년)으로 중앙미술대전에서 입선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1983년 가족들과 태백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오랫동안 탄광촌과 그들의 삶을 그림에 담아냈다. 월급봉투를 받기 위해 몰려든 노동자들의 뒷모습, 헤드 랜턴을 낀 채 갱도 내에서 도시락을 먹는 광부, 검은 탄가루가 묻은 얼굴과 대조돼 흰 목이 돋보이는 광부의 초상 등을 그렸다.

올해로 35년째 태백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황씨의 작업실은 태백문화예술회관 근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그를 닮은 차우차우 품종의 ‘몽고’가 일행을 반겼다. 2년 전부터 그는 물감 대신 머리카락을 접착제로 붙여서 재료로 쓰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머리카락으로 충당이 됐지만, 이젠 미용실 등에서 머리카락을 구입해서 쓰고 있다고 한다. “2년 전 현역에서 은퇴하신 교장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으로부터 황혼이혼 얘기를 들었습니다. 첫 딸을 출산하자 시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여 내왔는데 머리카락 한 움큼이 들어 있었다고 해요. 시어머니의 질투였죠. 며느리가 먹을 미역국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의 설명이 계속됐다. “머리카락은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잖아요. 내 몸을 말해주죠. 그때부터 머리카락을 작품 재료로 쓰기 시작했죠.”

작업실에는 최근 그가 다녀왔다는 러시아의 바이칼호를 그린 작품도 있었고,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담은 어머니를 그린 작품도 있었다. 작품 얘기를 듣는 동안 일행들은 결명자차와 떡을 대접받았다. 때 이른 추위와 허기를 달래기엔 더할 나위 없는 배려였다.

“사람들로부터 외로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럴 때면 감정을 몰아치지 말라고 얘기해요. 대책 없는 슬픔은 시간을 가지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제 작품들이 여러분들 삶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

작품을 보며 나눈 얘기도 좋았지만, 하이라이트는 인증샷이었다. 작품을 배경으로 황씨의 옆자리만 바뀌는 바람에 동행한 사진기자는 꼼짝없이 휴대폰을 바꿔가며 버튼을 눌러야 했다.

작업실을 나와 인근 맛집에서 설렁탕을 먹고 찾아간 곳은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통리재였다. 통리재는 그의 작품 ‘태백에서 동해로’ 배경이 된 곳이다. 그는 자신에게 각별한 곳인 통리재에서 일행들과 “소주 한잔 나눠 마셔도 되겠냐”며 미리 양해를 구했다.

“어느날, 술을 한잔 먹고 이곳에 왔는데 협곡에 광풍이 몰아쳤어요. 너무 감동적이었죠. 그때 ‘내가 너를 그려보겠다’ 맘먹었거든요. 그 다음 날 다시 찾아왔더니 어제 휘몰아치던 바람은 없고 고요했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는 화구를 싸서 돌아오는 길에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모든 건 내재된 것이다. 넌 왜 그걸 보지 못하니”라는 마음속의 울림이었다. 황씨는 “그러고 보니, 밭일 하는 할머니의 손등처럼, 외할머니의 발가락처럼 마디지고 굴곡진 산하가 보였다”면서 “산이 사람을 닮고, 사람이 산을 닮아 있더라. 그때부터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까지는 꼬박 30년이 걸렸다. “바람을 그림 안에 넣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일행들은 무슨 의식처럼 둥글게 모여 소주를 한잔씩 나눠 마셨다.

■ 시곗바늘이 멈춘 ‘철암탄광역사촌’

마지막 행선지는 탄광촌의 흔적들을 훑어보는 일이었다. 막장인생들이 모여 산다던 탄광촌. 막장이라는 수식어는 바로 탄광에서 나온 말이다. 철암동에는 석탄산업이 한창이던 1960~1970년대에서 시곗바늘이 멈춘 듯 탄광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철암천변을 따라 남은 옛 탄광촌 주거시설인 ‘까치발 건물’ 11채를 본래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은 ‘철암탄광역사촌’이다. 철암역 맞은편의 까치발 건물에 있던 다방, 식당, 중국집, 선술집, 슈퍼, 미용실 등 상가들은 당시 모습 그대로다. 간판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일부는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

11개 상점 중 지금도 영업 중인 곳이 있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간판과는 다르다. 중국집 ‘진주성’은 효소체험장이 됐고, ‘현덕건설’은 국밥집이다. 문구사인 대성사는 분식점이 됐다. ‘페리카나치킨’은 관광해설 사무실로 쓰인다. 철암천 건너편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며 손을 흔드는 광부 동상이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대문 앞에서 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다. 역사촌에서 ‘70인의 동행’ 하루는 마무리됐다.

황씨가 동행길 내내 강조했던 것은 예술의 대중성이었다. 그는 “주인공은 예술가가 아니라 관객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들이 관객들을 무작정 기다리며 누군가 내 예술을 알아줄 거라면서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시절은 지나갔어요. 꿈만 꾸지 말고 나와서 대중과 소통해야 합니다.”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황씨는 15년 전부터 전국을 돌며 무료로 미술강습도 하고 있다. 실제 광부로 일을 하기도 했던 황씨에게 모든 갱도가 문을 닫는 태백의 내일을 물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쉽게 얘기할 일이 아니다. 정부·주민 등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태백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30분이면 닿을 수 있다.

[명사 70인과의 동행] (65) 시계 멈춘 탄광촌·굴곡진 통리재, 바람을 그림에 넣는 데 30년 걸려…작품도 고독도 시간이 해결하죠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