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허기 채워준 산지식, 일흔 명의 이야기는 향기로웠다

2017.12.22 21:21 입력 2017.12.22 21:28 수정

인상적인 장면,잊지 못할 여정

<b>봄·여름·가을 바통터치</b>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함께 찾은 초봄 신동엽 시인 생가, 소설가 박범신이 땡볕 아래 안내한 충남 강경 옥녀봉 공원, 시인 안도현과 가을 한복판 찾아간 전북 변산의 마동방조제(위로부터). 경향신문 사진부

봄·여름·가을 바통터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함께 찾은 초봄 신동엽 시인 생가, 소설가 박범신이 땡볕 아래 안내한 충남 강경 옥녀봉 공원, 시인 안도현과 가을 한복판 찾아간 전북 변산의 마동방조제(위로부터). 경향신문 사진부

‘70인과의 동행’은 2년간 70차례에 걸쳐 실행된 대장정이었던 만큼 인상적인 사람과 장소들이 많았다. ‘동행’의 하이라이트들을 복기한다.

■ 당대의 이야기꾼들

올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을 베스트셀러에 올리며 건재를 과시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겸재 정선의 자취가 어린 한강변 소악루로 독자들을 안내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방의 독자들은 새벽 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유 석좌교수는 겸재가 조국 산천에 대한 자랑과 기쁨을 적극적으로 화면에 옮긴 첫 화가라고 설명했다.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선 독설도 서슴지 않는 그는 겸재의 그림이 30억원대에 낙찰됐다는 소리에 왜들 그리 놀라냐고 꾸짖었다. “단군 이래 최고 작가의 작품이 겨우 30억원이라고요? 그 시대에 중국에 겸재처럼 조국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그린 화가가 있었나?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b>겨울로 바통터치</b> ‘70인과의 동행’ 답사단과 함께 지리산 실상사 부근을 걸으며 생명평화운동을 이야기하는 도법 스님. 경향신문 사진부

겨울로 바통터치 ‘70인과의 동행’ 답사단과 함께 지리산 실상사 부근을 걸으며 생명평화운동을 이야기하는 도법 스님. 경향신문 사진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충남 부여의 신동엽 시인 생가를 찾았다. 백 소장은 세 살 연상 시인의 시에 반해 무작정 찾아간 날을 회고했다. “눈이 맑아 보였어. 눈에서 샘이 콸콸 쏟아졌지. 진짜 시인처럼 생겼었어.” 백 소장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돌담길을 걸으면서도 독특한 한국적 미학을 이야기했다. 둥그스름한 곡선이 어디서 끊기고 다시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돌담길이 길손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는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독자들과 함께 광주 5·18 자유공원, 망월동 묘역 등을 찾았다. 그날의 끔찍하고 슬픈 사연들이 줄줄 이어졌다. 한 참가자가 “그렇게 당하고도 왜 광주사람들은 전두환을 죽이려고 하지 않나”라고 물었다. 황 작가는 답했다. “그건 무책임한 견해예요. 역사적·정치적 단죄를 해야죠.” 황 작가는 새벽에 출발하는 동행 일정에 늦지 않기 위해 전날 수면유도제를 먹고 잤으며, 돌아온 날부터 이틀을 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말로 전하기 힘든 체험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와 함께 팽목항을 찾은 것은 세월호 2주기인 2016년 4월16일이었다. 새벽녘 서울시청 근처에서 출발해 자정 즈음해 돌아오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안산 단원고에서는 ‘4·16 기억교실’을 방문했고, 안산 정부합동분향소도 찾았다. 버스가 진도를 향해 달리는 동안 맑게 갠 하늘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진도 실내체육관에 도착했을 때는 폭우가 쏟아졌다. 우산, 우비가 소용없는 비였다. 미리 준비한 노란 비행기는 얼마 날지 못하고 떨어졌다. 참가자들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분향소에 들렀다.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전남 해남·강진 답사는 70회의 동행 중 유일한 ‘1박2일’ 일정이었다. 달마산을 병풍처럼 두른 미황사, 윤선도의 손길이 남은 녹우당 같은 ‘남도 답사 일번지’를 두루 방문했다. 대흥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한 일행은 새벽 3시 예불로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야생차밭에서 찻잎을 따고, 백련사에서 법인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다. 산과 절이 아름답거니와, 그사이에 깃든 말씀들은 향기로웠다.

도보여행가 김남희 작가와는 초가을 양평 물소리길을 걸었다. 길이 좁아지고 나무 그늘이 짙어지던 그 길에서는 사람의 말소리 대신 물소리만 들렸다. 자주색 리본이 길을 안내했지만, 자칫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김 작가는 “함께 길을 잃는 것도 묘미”라고 안심시켰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가던 길을 되돌아오곤 했지만, 앞에도 뒤에도 같은 곳으로 향하는 일행이 있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었다.

■ 금강산도 식후경

여행도 먹어야 한다. 박찬일 셰프는 인천 차이나타운 내 중화요리점을 벗어나 신흥동 신일반점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름있는 옛 중화요리점은 옛맛을 잃었다고 했다. 5년 된 노포인 신일반점 만두는 모양이 투박했지만 속이 촉촉했고, 짜장면에는 큼지막한 계란 프라이가 얹어져 나왔다. 탕수육은 시간이 지나도 눅눅해지지 않았다.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과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단체여행의 주의사항을 어겼다. 바로 ‘술을 마셔서는 안된다’는 조항이다. 부추지짐이, 엄나물 무침과 함께 마련된 오미자 막걸리를 마시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전부터 술을 한잔 걸쳤는데, 점심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는 봄기운을 담은 산채비빔밥 때문에 다시 한번 부른 배를 채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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