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재 건축가의 ‘이상한 설계’…누이는 그 불편함이 좋았다

2016.01.29 19:53 입력 2016.02.01 16:25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의상디자이너 김순자 ‘붉은 벽돌집’

서울 종로구 명륜동 주택가에 남다른 가옥이 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타계하기 3년 전에 지은 가정집. 그 시절 김수근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경동교회, 국립과학관 등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가 80평 남짓한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짜리 살림집을 설계했다. 왜?

2층 거실에서 골목으로 난 격자창은 좁은 거실에 개방감을 준다. 벽에 걸린 드로잉은 김수근의 작품이다.

2층 거실에서 골목으로 난 격자창은 좁은 거실에 개방감을 준다. 벽에 걸린 드로잉은 김수근의 작품이다.

그 집의 주인은 건축가의 바로 손위 누나인 의상디자이너 김순자씨(88)와 그의 부군인 고 박고석 화백(1917~2002)이다.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로, 재미 사업가로 평생 고생하며 살았던 누이가 여생을 보낼 집을 지었다. 김수근 건축의 특징인 붉은 벽돌집이다. 골조는 콘크리트와 나무다. 보통집 30채 분량의 미송이 들어갔다. 세월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탄탄하고 아름다운 그 집에는 김순자씨가 33년째 살고 있다. 이 집에는 ‘고석공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붉은 벽돌 바닥과 계단이다. 이 집보다 조금 앞선 대학로 문예회관(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샘터 사옥과 비슷하다. 검은색 목제 기둥과 창틀이 격자형으로 우람하게 집을 받치고 있다. 1층을 아케이드처럼 뒤로 물려 개방감을 준다. 가로로 긴 대지에 들어선 건물은 앞에서 보면 직선이고, 뒤로 돌아가면 살림집 용도에 맞춘 아기자기한 공간이 돌출돼 있다.

현관 안팎에는 화병과 돌확이 있다.

현관 안팎에는 화병과 돌확이 있다.

집 안에서 먼저 눈에 띄는 곳은 원형 계단이다. 생전의 박 화백이 작업하던 지하 아틀리에부터 옥탑방까지 뱅글뱅글 돌아간다. 4개층을 관통하는 계단은 집의 왼쪽 뒤편에 있고, 계단참마다 각층으로 통한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공용 공간이다. 김수근은 화가인 자형과 건축, 일러스트레이션, 사진을 전공한 세 조카를 위해 집인 동시에 아틀리에, 스튜디오이자 사무실인 설계를 채택했다. 실제로 이 집은 가족의 인생주기에 따라 각자 나고 들며 그렇게 쓰였다. 한층 전체가 넓게 트였고 휴식실, 수납실, 화장실이 숨어 있다.

2층은 오롯이 누이를 위한 생활공간이다. 침실을 들이고 나니 거실은 좁아졌다. 부엌과 다용도실을 놓았다. 그런데 이곳에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복도처럼 긴 거실의 맞은편에 툇마루가 있고 바닥이 높은 한식 방을 들였다. 창호지를 바른 여닫이 문을 열면 문갑과 책상, 사방탁자 등이 갖춰진 사랑방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누이의 기도실이다. 그 방의 벽에는 박 화백의 미완성 유화가 걸려 있다. 설악산 울산바위가 원경으로 보이는데 아래는 벚꽃이 흐드러진 쌍계사 풍경이다. 밝고 따뜻하다.

거실 맞은편 기도실. 출입문 바깥으로 원형 계단이 보인다.

거실 맞은편 기도실. 출입문 바깥으로 원형 계단이 보인다.

안주인은 기도실을 가장 좋아한다. 매일 불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잔잔한 노년의 일상을 이어간다. 다시 원형계단을 올라 옥탑방으로 가자 의상디자이너였던 김씨의 재봉틀이 보인다. 자식과 손주들이 입었던 옷들, 자투리 천들이 가지런히 서랍에 정리돼 있다. 옥상에는 2층 화장실, 부엌, 다용도실의 천창이 장방형으로 튀어나와 있다.

집의 내벽은 붉은 벽돌이다. 침실을 제외하고는 벽돌로 마감했지만 차가운 느낌은 들지 않는다. 거기에 어우러진 나무 때문이다. 건물 전면으로 난 거실창은 미송으로 짠 격자 미닫이창으로, 한쪽이 3m가 넘는다. 유리 대신 창호지를 발라서 커튼 없이도 필요한 빛만 통과시키는 창문을 활짝 열자 골목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격자 무늬는 건물 외관에도, 현관문에도, 거실창에도 적용돼 통일감을 준다. 방문, 창문, 가구까지 모두 같은 미송으로 맞췄다. 집을 지을 당시 10년간 말려 조금의 뒤틀림도 없는 나무는 이제 구할 수도 없다.

붉은 벽돌과 검은 목재가 어우러진 외관.

붉은 벽돌과 검은 목재가 어우러진 외관.

집은 고급스럽기보다 곡진하다. 그곳에 사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지은 건축이 갖는 진정성이다.

김순자씨는 집 지을 당시를 회고하면서 친정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아범이 나이가 됐고 초상나면 아파트에서 문상받기가 싫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야단을 치셨다. 예술가가 죽으면 거적문을 들추고 들어와야지, 좋은 집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뜻을 거스르고 집을 지었지만 어머니의 훈계는 못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 참 훌륭하신 분”이라고 했다. 이 집은 그에게 정착과 휴식의 의미였다. 김씨는 20여년의 미국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전쟁이 한창인 1950년 10월23일 박고석 화백과 결혼했다. 이화여대 미술과를 다니면서 대학생과 화가들의 모임에서 만났다. 그의 친정아버지 김용한씨는 일제시대 큰 사업가였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데 중학생 때 집을 나와 금광, 어장, 목재 사업으로 가산을 일구었다. 청진에 집이 있었으나 4남1녀는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시켰다. 침모가 옷을 지었고 러시아에서 건축기사를 데려와 집을 지었다. 청진 식구들이 서울나들이를 할 때는 기차 1량을 빌려 타고 다닐 정도였다.

박 화백은 평양의 목사인 박종은씨의 4형제 중 막내였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요셉이 그의 이름이지만 숭실중 재학 시절 낡은 돌(古石)이란 예명을 스스로 지었다. 니혼대 미술과를 졸업한 뒤 1943년 도쿄 사쿠하치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해방 후 월남해 홍익대, 중앙대, 세종대 교수를 지냈다.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사업가가 싫었던 그는 화가의 자취방에 덩그러니 놓인 고리짝이 좋아 보였다. 서울수복 직후에 태화여자관에서 올린 결혼식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7명만 참석했다. 결혼식 사진은 동생 김수근이 찍었다.

결혼하자마자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환도해 서울 정릉에서 살았다. 기태(1951년생), 은영(1953년생), 기준(1956년생), 기호(1960년생) 등 4남매가 태어났다. 그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복 짓는 일을 시작했다. 국립악극단 의상을 맡아 집에서 한복을 만들었다. 이웃에 살던 음악평론가 박용구씨가 오페라 무대 관련 서적을 건네곤 했다. 당시에는 궁중의상을 본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낙선재 이방자 여사(고종 황태자 이은의 비)가 옷을 보여주거나 도움말을 주었다. 궁중의상연구가라는 직함을 얻었다.

그러다가 1964년 하와이와 워싱턴 D.C.에서 미국 국회의원부인회 주최로 한복패션쇼를 열게 됐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이듬해 패션학교에 입학했다. 4남매가 딸린 37세의 주부였지만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향학열에 불탔다. 이곳에서 기티라는 이란계 미국 여성을 만나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옷을 직접 디자인해 만들면서 코디네이터 역할까지 맡았다. 한국에서도 사업이 될 것 같아 서울로 돌아와 조선호텔에 2년간 방을 임대해 고관대작의 부인을 대상으로 코디네이션을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196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순자 박 디자인’이란 이름으로 앵커 바버라 월터스를 비롯한 방송인, 메리어트호텔의 설립자인 메리어트가 여성들, 국회의원 부인 등의 의상을 제작, 자문했다. 그러면서 막내부터 4남매를 차례로 미국으로 불러 공부시켰다. 삼촌의 건축사무소인 공간에서 일하던 장남 기태씨가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 입학하고 막내 기호씨도 대학생이 되자 1982년 사업에서 은퇴해 남편 혼자 살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이듬해 명륜동 집을 짓고 살면서 안정을 찾았다. 김씨는 차남이 결혼하면서 집을 맡기고 설악산에 작업실을 얻어 살던 1989년부터 2~3년간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꼽는다. “그때는 선생도 아니고 공동체의 사람도 아니고 여자들의 애인도 아니고, 오롯이 내 남편이었다”고 회고한다. 설악산에 살면서 남편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은 살림을 했다. 언제나 함께였다. 병세가 나빠져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때의 행복했던 추억 때문에 나머지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예술가 아내의 삶은 벅찬 일이다. 창작의 불안을 지켜봐야 한다.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적어도 그의 시대는 그랬다.

박고석은 부산 피란시절 이중섭, 김환기, 한묵 등과 어울렸다. 특히 이중섭(1916~1956)은 함께 지내다시피 했다. 그는 너무 가난한 나머지 겨울에도 불을 땔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는 남편이 “양심이 있으면 중섭이 방에 연기라도 내보라”고 했다. 그 말에 화가 난 그는 이중섭의 집으로 갔다. 방에는 스케치북, 일본 부인에게 쓴 편지, 담뱃갑 은박지 그림 등이 널려 있었다. 싹 걷어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나중에 그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잘 태웠어. 그림이 너무 많으면 희소가치가 없거든”이라고 말했다.

이중섭의 뼛가루를 먹기도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종이에 싼 가루를 주면서 잘 놔두라고 했다. 뭔지 궁금해서 펴보니 하얀 가루였다. 손으로 찍어 먹어봐도 별맛이 없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뒤 남편이 그때 맡겨둔 종이를 찾았다. “무슨 종이?” 했더니 “중섭이 말이야”라고 했다. 이중섭을 화장해 3분의 1은 일본 가족에게 보내고 3분의 1은 산에 뿌리고 나머지를 가져왔던 것이다. “뼛가루란 말을 듣고도 어떤 역겨운 기분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았다”고 한다. 그 가루를 항아리에 담아 놓고 제사상을 차렸다.

신문이나 잡지 삽화를 많이 그리고 종종 칼럼도 썼던 박 화백은 김수영 구상 최인훈 등 문인들과 많이 어울렸다. 고은 시인은 정릉집에 식객으로 여러 해 머물렀다. 1960년대 후반의 어느 날, 잠시 미국에서 다니러 왔는데 밤에 샹송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알고 보니 고은 시인이 독경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김씨는 동생 김수근을 도피시킨 기억도 풀어놓았다. 1950년 서울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한 김수근은 전쟁이 일어나자 징집돼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휴가를 받아 부산 신혼집으로 찾아왔는데 그냥 놔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댁은 평양의 시어머니가 보내준 다이아몬드 반지와 신랑의 유화물감 박스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밀항해줄 사람을 사서 동생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도쿄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뒤 1960년 국회의사당 건축설계경기에 1등 당선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처럼 둘도 없는 오누이 사이였던 동생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자신이 집을 지으면 반드시 비가 새고 불편하니까 아파트나 다른 집을 얻으라고 했다. 재차 부탁했다. “불편을 멋으로 알고 살 테니 네 마음대로 지어보라”고 했다. 그는 “동생이 누나를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창이 많아서 춥고 설계를 따르지 못하는 시공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비가 샜다. 가파른 원형계단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나 힘든 줄 몰랐다. 9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도 한다.

그는 계단참의 창턱에 말린 꽃과 과일을 놓았다. 늘 이 공간을 가꾼다. 현관에도 화병이 있다. 콩물에 들기름을 섞어 가구를 닦는다. 김수근의 마지막 가정건축인 이 집을 바깥에서 둘러보는 이들이 많다. 칭송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가 들었던 최고의 칭찬은 공사장 인부들이 지나가면서 “이 집, 참 잘 지었다”는 말이었다. “얼마나 고맙고 기쁘던지 얼른 나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순자는

[집이 사람이다] (4) 천재 건축가의 ‘이상한 설계’…누이는 그 불편함이 좋았다


1928년 함경도 청진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1950년 박고석 화백과 결혼해 3남1녀를 낳았다. 1964년 한국 최초로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D.C.에서 궁중의상패션쇼를 열었으며 1968년부터 198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의상 디자인과 제작, 코디네이션을 하는 ‘순자 박 디자인’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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