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여성'은 여성 아니다"···배타적 여성주의자 '터프'들은 누구인가

2020.02.14 18:33 입력 2020.06.15 10:38 수정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최종 합격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두고 숙명여대  교내 게시판에 찬성과 반대를 나타내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최종 합격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두고 숙명여대 교내 게시판에 찬성과 반대를 나타내는 대자보가 나란히 붙어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나는 비록 여기에서 멈추지만 앞으로 다른 분들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020학년도 숙명여대 합격을 알렸다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ㄱ씨가 지난 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ㄱ씨가 숙명여대에 다니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온라인 공간에선 ‘#합격축하해요_우리가여기있다’와 같은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입학 반대’ 표명도 잇따랐다. 특히 여대 내 일부 페미니즘 단체들이 낸 반대 성명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ㄱ씨의 입학 포기 이후엔 ‘성별 변경 남성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를 환영한다’와 같은 성명도 나왔다.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 반대’ 사건 이후 여성단체 내부에선 ‘트랜스젠더 혐오’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을 ‘여성혐오’ 정당화 구실로 삼으려는 이들도 있다.

여성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구속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논쟁이 격화하는 지금 필요한 작업은 ‘트랜스젠더 배제’의 논리를 살펴보고 ‘극복’의 길을 찾아보는 일 아닐까.

‘트랜스젠더 배제’ 논란은 영미권의 여성해방운동 과정에서도 불거졌으며 길게는 40~50년 동안 논쟁을 거듭해왔다. 일명 ‘터프(TERF)’로 불려온 영미권의 ‘트랜스젠더 배제론’ 논란을 간략히 살펴본다.

■‘터프(TERFs)’의 탄생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터프·TERFs)란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의 약자다. 트랜스젠더, 그중에서도 트랜스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을 가리킨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터프는 동의어가 아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트랜스젠더와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이들이 있다.)

터프의 탄생은 197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는 강력한 여성해방운동의 물결이 일며 급진적 여성주의가 힘을 얻던 시기였다. 트랜스 배제의 이론을 최초로 ‘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 저서가 이 시기 나왔다. 1979년 매사추세츠 대학의 교수이자 래디컬 페니미스트인 재니스 레이먼드가 출간한 책 ‘성전환 제국: 쉬메일(shemale)의 형성’이다. (쉬메일은 ‘트래니’와 함께 지금도 트렌스젠더들을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터프 운동계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책을 통해 레이먼드 교수는 성전환이 전통적 성역할을 강화시키며, 성전환수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출간된 재니스 레이먼드의 저서 <성전환 제국: 쉬매일(shemale)의 형성>의 표지. 아마존

1979년 출간된 재니스 레이먼드의 저서 <성전환 제국: 쉬매일(shemale)의 형성>의 표지. 아마존

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40년 전에 등장했지만, 이들에게 ‘터프’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2008년 이후부터다. 호주의 프리랜서 작가 비브 스미스가 기고문 ‘카니발리아, 성전환주의 그리고 젠더 이분법’에서 처음 사용했고, 이후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며 퍼져나갔다.

터프들에게 트랜스 여성은 여성의 정체성을 사용해 여성의 공간에 침범하려는 ‘남성’이다. 이들의 이념 체계에선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하며 이를 가르는 기준은 ‘염색체’ 뿐이다. 즉 성전환수술을 받은 트랜스 여성이라도 염색체는 남성이므로 여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터프들은 또 트랜스 여성이 (‘진정한’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회가 규정한 성역할에 충실히 복무해 여성 인권 후퇴에 기여한다고 본다.

그러나 ‘트랜스 여성’이 아닌 ‘트랜스 남성’에 대해서는 터프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피하기 위해 남성으로 살고자 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 한편 ‘배신자’로 보는 이들도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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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라’ 요구했던 과거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이 생겨나면서, 여성들이 ‘트랜스 여성’에게 ‘우리 공간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웨스트 코스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컨퍼런스’에서 트랜스젠더 가수인 베스 엘리엇이 공연을 하자 일부 참가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트랜스 여성’은 레즈비언을 위한 무대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특히 ‘미시건 워민 포크 페스티벌(Michigan Womyn‘s Falk Festival)’ 사건은 터프의 입장이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했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페스티벌은 1976년부터 시작되어 40년간 이어져 온 매우 유명한 ‘페미니스트 여성 음악 축제’였다. 여성들이 축제를 준비하고, 여성 아티스트들만 초대되며, 여성만 참가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여성의 해방구’ 같은 축제였다. ‘Womyn’이란 철자 또한 ‘Women’의 ‘men’을 쓰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페스티벌은 2015년 종료되고 말았다. 주최측이 트랜드젠더 여성의 참여를 저지하려는 듯한 태도를 줄곧 견지해 논란이 일었던 탓이다.

미시건 워민 포크 페스티벌의 주최측은 ‘여성-여성으로 태어난 여성(Womyn-born womyn)’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는데 이 표현엔 여성 성기를 갖고 태어나지 않은 ‘트랜스여성’을 배제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미국 내 여러 인권운동단체의 항의가 이어졌지만 주최측은 이 구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014년 무렵부터 여러 아티스트들이 불참을 선언했고 2015년 8월의 공연을 끝으로 이 축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지난해 9월 한국YWCA연합회 강당에서 열린 강연 중 참석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 탁지영 기자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지난해 9월 한국YWCA연합회 강당에서 열린 강연 중 참석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 탁지영 기자

■세월흘러 약화된 ‘터프’

터프들의 이론 ‘터피즘’은 반세기를 거치며 힘이 약화됐다. 미국 내 터프 그룹인 여성해방전선(WoLF) 같은 단체가 ‘여성노숙자 쉼터에 트랜스젠더 여성을 받아줘선 안 된다’는 서한을 미 정부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치지만 미국 사회는 그리 큰 위협으로 여기지는 않는 분위기다.

한때 ‘반 트랜스젠더’ 입장을 취했던 페미니스트들은 점차 입장을 수정하거나 철회했다. 이를테면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70~80년대에 성전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타이넘이 남긴 유명한 구절 ‘신발이 맞지 않는다고 발을 바꿔야 하나’에는 성전환 수술이 사회가 주입하는 성역할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 그러나 최근 스타이넘은 자신의 입장을 조정했다. 그는 2013년 LGBT 잡지 ‘디 애드버킷’에 보낸 기고문에서 “트랜스젠더는 환영받아야할 존재이지 추궁당해야할 존재가 아니다”라면서 “수십년 전 내가 쓴 글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반영돼 있지 않다. 우리는 남성적·여성적이라는 이분법만 존재하던 시절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썼다.

다만 같은 영미권이라도 영국에선 여전히 ‘반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이 더 활발하다. 때로 유명 인사까지도 터프 그룹과 유사한 입장을 취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 조앤 롤링이 대표적이다.

조앤 롤링은 최근 ‘반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를 옹호하는 트위터 메시지로 구설에 올랐다. 조앤 롤링이 지지를 표명한 인물은 ‘마야 포스테이터’라는 세계개발센터(CGD) 여성 직원으로, 온라인에서 ‘반 트랜스젠더’ 운동을 매우 활발하게 벌여왔다. ‘트랜스젠더 혐오’ 성격의 게시물을 대량으로 트위터에 올린 사실이 드러나자 세계개발센터는 마야 포스테이터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마야 포스테이터는 세계개발센터를 상대로 영국 고용심판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마야 포스테이터의 주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존중할 만한 의견이 아니”라고 판단해, 패소하고 말았다. 조앤 롤링은 자신의 소설 <실크웜>에 작중 주인공이 ‘(트랜스 여성에 의한) 여성 교도소 내 강간’을 언급하며 트랜스젠더를 위협하는 장면을 담아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올해로 20번째 생일을 맞는 서울퀴어문화축제가 1일 오후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을지로, 종로를 거쳐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올해로 20번째 생일을 맞는 서울퀴어문화축제가 1일 오후 서울광장 일대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을지로, 종로를 거쳐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운동(Movement)은 흐르는 강과 같다”

“지난 수년간 터피즘(TERFism)은 온라인 공간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격렬한 수준의 ‘젠더 크리티컬’(터프 그룹은 자신들을 ‘젠더 크리티컬’이라고 부른다)들은 소수지만 이들이 트위터를 비롯한 SNS 공간에서 트랜스젠더와 그 지지자들을 비웃고 괴롭히는 일이 일종의 스포츠처럼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케이틀린 번스가 미 온라인 미디어 ‘복스’(VOX)에 쓴 <안티 트랜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부상에 대한 해설>에서 한 말이다. 그는 미국의 유명 페미니스트 작가인 새디 도일이 터프를 비판하자 트위터에 달린 수십개의 비난 댓글들을 예로 들었다.

“운동(Movement)은 흐르는 강과 같다. 한번 발을 담근 곳에 다시 담글 수는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디 애드버킷’ 기고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이 ‘반 트랜스젠더’ 입장을 취했던 것은 그 시절 나름의 맥락이 있었으며 지금은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모든 사상엔 늘 여러 갈래의 세부 이론과 주장이 잇따랐다. 각 이론의 지지자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동시에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트랜스젠더 신입생을 둘러싸고 여성운동 내부에서 벌어진 다양한 논쟁은, 한국의 페미니즘이 극복해야할 또다른 과제 앞에 섰음을 보여준다. <송윤경·최민지 기자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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