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말고, 나에게 맞췄더니…세상이 나를 반겨주더라

2020.06.20 06:00 입력 2020.06.20 08:22 수정

자신 만의 취향으로 앱 ·게임 만드는 ‘비전공’ 여성들…‘북적북적’의 박성은, ‘시미’ 의 김지원·김해인·조현아

자존감 키우기 게임 ‘시미’를 만든 조현아·김해인·김지원씨와 독서 기록 앱 ‘북적북적’을 개발한 박성은씨(왼쪽부터)

자존감 키우기 게임 ‘시미’를 만든 조현아·김해인·김지원씨와 독서 기록 앱 ‘북적북적’을 개발한 박성은씨(왼쪽부터)

“당시 우리는 나중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정확히 몰랐지만, 그런 방랑이 우리의 진짜 일이었던 셈이다.”작가 리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친구 소피와 20대 후반 뉴멕시코로 떠나던 길을 이렇게 회고했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20대 여성들의 진로는 어떨까. 점수에 맞춰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게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이들은 어떤 경험과 경로로 일을 선택하게 될까. 비전공자로 좌충우돌하며 게임과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낸 네 명의 20대 여성을 지난 8~9일 만났다. 대학 입학 후 전과와 복수전공,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시도로 길을 탐색해온 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컸다. 독서 기록 앱 ‘북적북적’을 개발한 박성은씨(28)와, 자존감 키우기 게임 ‘시미’를 함께 만든 김지원(26)·김해인(27)·조현아(26)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내가 쓰고 싶어 만드는 앱

세상 말고, 나에게 맞췄더니…세상이 나를 반겨주더라

북적북적은 지난해 앱스토어에 출시돼 10개월 만에 10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 지금은 구글스토어에서도 받을 수 있다. 읽은 책을 검색해 등록해두면 목록을 확인할 수 있고, 월별 독서량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일정 권수가 채워질 때마다 귀여운 캐릭터가 모인다. 별점 다섯 개를 준 이용자들은 이런 후기를 남겼다. ‘북적이 덕분에 책 읽는 게 너무 재미있고 얼른 완독하고 싶어져요.’ ‘휴대폰 생긴 뒤로 책을 잘 안 읽게 됐는데 이 앱 덕분에 다시 읽게 됐습니다. 캐릭터 도장깨기 하는 재미도 있고, 읽은 책을 높이로 쌓아주니 좋네요.’

“제가 책을 읽고 기록한 다음 그걸 보면서 뿌듯해하는 걸 참 좋아하거든요.” 성은씨는 약 한 달을 투입해 혼자 이 앱을 만들었다. iOS용 앱 개발에 쓰이는 프로그래밍언어 스위프트(Swift)를 배우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이룬 성과다. “이게 아마 제가 개발자가 되기로 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 같아요.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없네? 그럼 내가 만들어야지.’ ”

앱 개발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컴퓨터공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자신이 만들었다며 게임 앱을 보여줬다. “지금 생각하면 별게 아닌데 그땐 너무 놀라웠어요. 사람들이 이 게임을 실제로 하고 후기를 남긴 걸 보니 되게 신기한 거예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도시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성은씨는 이듬해 컴퓨터공학과에 복수전공 지원했지만 연관과목 성적이 좋지 않아 떨어졌다. 포기하는 대신 한번도 안 해본 동아리 활동을 4학년에 시작했다. 코딩이며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지내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동안을 돌아봤다. 성은씨도 여느 대학생처럼 ‘대략 선배들이 입사하는 몇몇 기업쯤 가겠거니’ 생각하고 학과 공부에 집중했다. 재수를 했으니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여기고 휴학 한번 하지 않았다. 취업준비 시즌이 되자 생각도 해보지 않은 직군에 마구 지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관심사가 아닌 데에 나를 맞춘다는 게 너무 고역이더라고요. 내 맘에도 아니란 걸 알면서 원서를 넣으니까, 어찌 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였죠.” 개발 동아리 활동을 계기로 스타트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 1년이 채 못 돼 위기가 찾아왔다. 한 대기업의 자회사로 주차 관련 사업을 하던 성은씨의 회사는, 모회사가 관련 서비스를 통합해 ‘모빌리티’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사실상의 공중분해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남성이었던 다른 팀원들은 주차장 영업 등 업무에 하나씩 차출되고, 성은씨에겐 단순 문서 작업이 떨어졌다. 역할이 없이 ‘붕 뜬’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내 손으로 완결지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창작자로서 개발자가 되면 어떨까 하다 결론을 냈다. ‘지금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하겠구나.’

2018년 초부터 개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두 군데의 직장을 거치는 와중에 일정관리 앱 하나를 직접 만들어 관리했고, 두 번째로 내놓은 것이 북적북적이다. “얼굴 모르는 분들한테 도움 많이 받았죠.” 모를 때는 검색, 또 검색, 벽에 부딪히면 개발자 커뮤니티에 묻고 또 물어가며 답을 구했다.

“빨리 취직해야 한다, 졸업해야 한다, 이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정해진 순서에 맞춰 살다가 너무 늦게 제 길을 찾은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이 쌓였으니 지금의 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해보고 싶은 게 있는 분들은 하루라도 빨리 도전하시면 좋겠어요. 앱 만들기를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면 더 많이 하지 않을까요?”

성은씨는 지금 숙박플랫폼 여기어때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북적북적 앱은 퇴근 후나 주말을 이용해 보수한다. ‘연도별 결산을 캡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 메일을 보낸 게 며칠 전인데 바로 앱을 업데이트해주시고! 최고예요 최고.’ 이런 리뷰를 보면 힘이 난다. “이용자분들이 생각보다 정말 다양한 피드백을 보내주세요. 그걸 보고 저도 성장하는 거죠.”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찾다

세상 말고, 나에게 맞췄더니…세상이 나를 반겨주더라

초록색 이파리를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분홍색 캐릭터 시미가 길을 떠난다. ‘예쁘게 꾸며서 나무처럼 보여야 한다’는 종족의 문화를 거부하고, 진짜 자기 모습을 찾기로 한 것이다. 유저는 시미가 나뭇잎을 모두 떨궈낼 수 있도록 퍼즐을 풀어나가야 한다. ‘눈물 핑 하는, 따뜻한 게임이었습니다. :)’ ‘덕분에 힘이 되었습니다. 정말 가치 있는 게임입니다.’ 구글플레이에는 이런 감동의 후기가 줄을 잇는다.

이 게임을 만든 지원·해인·현아씨는 2018년 서울여대 콘텐츠미디어학과의 졸업전시 프로젝트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휴학을 마치고 와서, 전과를 해서, 복수전공자라서 학과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던 ‘늦깎이’ 13학번 셋은 자신들은 ‘고인물’이라고 반쯤 자조하며 팀 이름을 ‘고인돌’로 붙였다.

세 사람은 ‘자존감’이라는 주제로 뭔가를 만들자는 데 일찌감치 뜻을 모았다. “스펙, 돈, 명예, 외모…. 모두가 너무 많은 것을 갖추어야 하는 세상에서 누가 들어도 공감할 만한 문제 아닌가 싶었어요.” 평소 게임을 좋아하던 해인씨가 이 내용을 게임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접한 책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에서 영감을 얻었다. 성장이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다른 게임과 달리 ‘가짜 자존감’을 상징하는 나뭇잎을 버려나가는 게 게임의 중요한 특징이 됐다.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무성별의 캐릭터 시미는 현아씨가 그렸다. 지원씨의 UX·UI 디자인 작업을 거쳐 시미의 ‘초안’이 만들어졌다. 게임학과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게임회사와 아는 작가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해인씨 표현을 빌리면 ‘알음알음 도움을 끌어와’ 완성한 작품이다. 졸업전시 작품을 눈여겨본 게임회사 겜브릿지가 협업을 제안한 덕분에, 정식 개발을 거쳐 지난 1월 정식 출시됐다. 고인돌 팀은 졸업 후에도 각자 시간을 내 1년을 더 매달려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이들은 취업 전 ‘진짜 내 것을 만들어볼 기회’가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현아씨) “상업적 콘텐츠는 타기팅을 확실히 하고 작업을 시작하잖아요. 그저 해보고 싶은 걸 구현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요.”(해인씨)

학번이 같은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 말을 놓지 않는다. 그런데도 셋이 모이면 무척 친하고 편안하다. “많이 싸웠죠. 들숨 때 싸우고, 날숨 때 싸우고.”(현아씨)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기 때문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해인씨)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마음껏 토론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명에게 권위가 쏠려 있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겠죠?”(현아씨)

가짜 자존감에 휩쓸리지 않을 것.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될 것. 게임에 담고자 했던 이 메시지는 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는 남들과의 비교가 저를 많이 괴롭혔던 것 같아요. 시미 작업을 하면서 그런 습관이 많이 없어졌어요.” 지원씨는 시미 작업을 마친 후 “취업은 잠깐 미뤄두고” 개인 프로젝트를 더 해보기로 했다. “따뜻함과 위로를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의 목소리에 더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이다. 현재 오프라인 편지 발송 서비스 ‘아투와’(인스타그램 from.atoi)를 실행 중이다. 유료로 신청을 받아 직접 만든 편지지에 손편지를 써 우편으로 발송하고 있다.

현아씨와 해인씨는 겜브릿지 소속으로 게임업계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임팩트 게임’ 제작을 목표로 하는 이 회사는 여성 직원이 남성보다 많다고 한다. 남초 게임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해인씨는 현재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전쟁범죄를 소재로 한 게임 ‘웬즈데이’의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다. “시미처럼 저의 취향이 반영된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싶어요.”(현아씨) “진지한 주제를 게임으로 계속 잘 풀어내고 싶어요.”(해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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