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아이의 눈망울은 아팠다

2017.12.01 10:00 입력 2017.12.01 10:06 수정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의 눈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아이의 눈망울에 상처가 새겨있다고 느껴졌다. /강윤중 기자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의 눈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아이의 눈망울에 상처가 새겨있다고 느껴졌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난민 취재기]①난민촌 가는 길···걱정 쫓는 주술 ‘23’
▶[로힝야난민 취재기]②메인널고나로 가다

전날 취재 덕에 낯선 현장취재에 따르는 걱정과 긴장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사진이 가능한 것을 가늠할 수 있었고, 불가능하다 싶은 것은 포기할 수 있었다. 첫날이 힘든 법. 이틀째 취재에 나서면서 몸은 가벼웠다. 둔한 몸이 현지에 적응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승합차는 경적을 미친 듯이 울리며 달렸다. 거리의 수많은 릭샤와 버스와 트럭들도 질세라 밀어붙이고 또 밀리며 경적을 울려댔다. 전날 난민촌을 향하며 ‘저개발국의 무질서’로 받아들였던 것이 ‘묘한 질서’로 다가왔다. 무질서 속에 유연한 질서라고 할까. 이 엉망인 도로에서 사고가 안 나는 게 희한하다 생각하다가, 급기야 ‘이건 예술이야’라고 감탄하고 말았다. 경적은 “비켜”가 아니라 “조심해”에 가까운 표현인 듯했다. 뭐, 그 말이 그 말일 테지만.

이날 목적지는 하킴파라(Hakimpara) 캠프다. 전날 갔던 메인널고나를 포함해 쿠투팔롱, 벌마파라, 발루칼리 등 미얀마와 가까운 콕스바자르의 남부는 거대한 난민촌이었다. 하킴파라의 들머리에도 난민들의 줄이 길었다. 구호활동가들은 분주했다.

하킴파라 난민촌. 언덕을 깎아 다진 바닥에 나무와 천을 엮어 집을 지었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난민촌. 언덕을 깎아 다진 바닥에 나무와 천을 엮어 집을 지었다. /강윤중 기자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 전경.  /강윤중 기자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 전경. /강윤중 기자

난민들이 하킴파라 난민촌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걷고 있다. /강윤중 기자

난민들이 하킴파라 난민촌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걷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한 난민이 임시거처의 지붕 위에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한 난민이 임시거처의 지붕 위에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얼마쯤 난민촌으로 걸어 들어가자, 합창 같은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이라는 곳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적십자·적신월사 활동가와 몇 개의 원을 만들고 마주앉아 자기소개를 하는 놀이를 진행했다. 놀이를 하는 동안 큼지막하게 이름을 쓴 셔츠를 아이에게 입혀주었다.

로힝야 난민 어린이들이 하킴파라 난민촌의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에 각국에서 온 적십자 활동가들과 놀이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 어린이들이 하킴파라 난민촌의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에 각국에서 온 적십자 활동가들과 놀이를 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알만한 구호단체들이 운영하는 ‘아이들의 공간’이 난민촌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호단체들은 어린이들의 안정과 심리를 관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얀마에서 이 아이들이 눈으로, 몸으로 겪었을 고통을 그려보았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과거가 아닌 미래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의 존재가 아닌가.

아이들이 난민촌 내 아동친화공간(child friendly space)에서 각국에서 온 적십자 활동가들과 놀이를 하던 중 카메라를 장난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아이들이 난민촌 내 아동친화공간(child friendly space)에서 각국에서 온 적십자 활동가들과 놀이를 하던 중 카메라를 장난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사진기자의 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동친화공간’ 천막에 붙은 금지 표시였다. 장총과 카메라 그림을 가로질러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총질’과 ‘카메라질’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총질은 당연히 허락도 안 될 것이지만, 카메라질은 허락과 동의하에 가능할 것임에도 ‘이거 찍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게 했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구호단체 어른들의 배려이자 다짐으로 읽혔다. ‘카메라질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예전에 카메라를 본 아이가 총인 줄 알고 겁먹은 눈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외신사진이 스쳐갔다. ‘카메라가 총과 나란히 폭력도구로 인식되는구나.’ 카메라의 폭력성을 가끔 새기긴 하지만 총과 동격의 대우를 받으니 낯설었고 또 괜히 서운했다.

하킴파라 난민촌의 ‘아동친화공간’에 카메라와 총을 금지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난민촌의 ‘아동친화공간’에 카메라와 총을 금지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강윤중 기자

아동친화공간 외부에 그려진 총과 카메라 금지 표시. /강윤중 기자

아동친화공간 외부에 그려진 총과 카메라 금지 표시. /강윤중 기자

나지막한 산같은 언덕을 두어 개쯤 넘어 ‘이동진료소’에 이르렀다. 일본, 홍콩의 적십자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 의료진이 난민들을 진료했다. 국적도 다르고 일면식도 없는 의료진이 ‘붉은 십자’가 그려진 조끼를 입은 일행을 보자 그렇게 반가워했다. 악수하며 ‘어디서 온 누구나’ 통성명을 하고 서로 격려했다. 멀리 타국에서 만난 인연이 반갑고, 동지애 또한 느끼는 모양이었다.

일본, 홍콩 등에서 온 적십자 의료진과 활동가들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촌 내 설치된 이동진료소에서 난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일본, 홍콩 등에서 온 적십자 의료진과 활동가들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촌 내 설치된 이동진료소에서 난민들을 진료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한국과 일본의 적십자사 활동가들이 하킴파라 이동진료소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한국과 일본의 적십자사 활동가들이 하킴파라 이동진료소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진료소 바깥으로 긴 줄이 이어졌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인 줄 알았더니 난민촌 내 임시거처를 등록하는 줄이었다. 가족단위로 서서 거처의 고유번호와 가족신상 등이 적힌 카드를 들고 하얀 천을 배경으로 섰다. 방글라데시 군인이 휴대폰 카메라로 가족의 사진을 찍었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든 군인이다. 아동친화공간의 금지 그림이 스쳤다. ‘총’과 ‘카메라’는 그렇게 상호전환이 가능한 것이었다. 구호품 수령과 가족 관리 등 행정 편의를 위한 절차로 보였다. 가족들 얼굴이 굳었다. 긴장한 표정이다. 미얀마 군인들의 폭력(탄압)을 보았을 가족에게 국경 넘어 군인들이라고 편할 리 없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해도. 이들에게 어쩌면 생애 첫 가족사진 일지도 모른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한국어로 시작해 다시 한국어로 돌아오는 통역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기다리는 난민들의 줄은 길었다.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엘리야스(오른쪽) 가족이 하킴파라에서 임시거처 고유번호 등록을 위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 무함마드 엘리야스(오른쪽) 가족이 하킴파라에서 임시거처 고유번호 등록을 위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 가족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캠프에서 임시거처 등록 등을 위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 가족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난민캠프에서 임시거처 등록 등을 위해 가족사진을 찍고 있다. /강윤중 기자

가족사진을 찍는 동안 임시거처 고유번호를 든 아이.  /강윤중 기자

가족사진을 찍는 동안 임시거처 고유번호를 든 아이. /강윤중 기자

임시거처 등록 등을 위해 사진찍는 난민 가정. /강윤중 기자

임시거처 등록 등을 위해 사진찍는 난민 가정. /강윤중 기자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걸었다. 언덕을 계단식으로 깎은 자리에 어김없이 임시거처 천막이 들어섰다. 이미 꽉 들어차 있는 곳이 있고, 이제 막 지어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난민촌은 계속 넓어져갔다. 난민촌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일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기자는 모든 사진의 기본이요, 시작을 ‘전경’이라 생각한다. 난민촌의 땡볕은 거침이 없었다. 더위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아이들의 호기심을 보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수줍어했고, 사진을 보여주면 ‘까르르’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는 바로 이 순간의 ‘셔터질’은 폭력 아닌 위로라 말할 수 있으리라. 사진을 뽑아 줄 수 없어 아쉬웠다.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로힝야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강윤중 기자

카메라를 바라보며 포즈 취하는 로힝야 난민들. /강윤중 기자

카메라를 바라보며 포즈 취하는 로힝야 난민들. /강윤중 기자

어김없이 난민촌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막힌 곳이 없어 바람이 자주 불며 지나갔다. 구름이 조금 끼었고 하늘은 맑았다. 머리 위 높이 연 하나가 날았다. 연줄을 쥔 아이는 일행의 시선에 신이 났다. 고향에서 가져온 연일 것이다. 흰 구름과 파란색의 하늘을 오가며 날고 있는 연을 보며 기왕이면 파란 쪽 하늘에 머물기를 바랐다. 파란 하늘이 희망의 은유이기를 주문하면서.

하킴파라 난민촌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난민촌의 가장 높은 곳에서 한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아이를 안은 로힝야 난민 여성이 난민촌의 흙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아이를 안은 로힝야 난민 여성이 난민촌의 흙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 파란 하늘 아래 나무와 천을 엮어 지은 임시거처 사이로 아이가 걷고 있다.  /강윤중 기자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 파란 하늘 아래 나무와 천을 엮어 지은 임시거처 사이로 아이가 걷고 있다. /강윤중 기자

어린 동생을 안은 아이가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어린 동생을 안은 아이가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강윤중 기자

물 긷는 난민들. /강윤중 기자

물 긷는 난민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난민캠프 모습.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난민캠프 모습. /강윤중 기자

한 가정을 방문했다. 넓지 않은 임시거처에 11명의 가족이 모여 살았다. 나무 기둥에 천을 이리저리 엮은 집이다. 단단하게 다진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았다. 음식을 하던 참이었던지 불을 지폈던 천막 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눈이 따가웠다. 취재기자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굳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떠올리기 싫은 고향땅의 기억이 되새겨졌을 거라 짐작했다.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만난 압둘 와히드씨(62) 가족. 대나무와 천을 엮어 만든 거처에 대가족이 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콕스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만난 압둘 와히드씨(62) 가족. 대나무와 천을 엮어 만든 거처에 대가족이 살고 있다. /강윤중 기자

천막 안은 덥고 습했다. 대가족에, 우리 일행에, 구경 온 동네 사람까지 북적였다. 천막에 가로로 길게 벌어진 틈 사이로 간간이 산바람이 비집고 들어왔지만 더위와 습기를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무언가 나의 시선을 스쳐갔다. 잠시 주춤했다. ‘뭐였지’하고 다시 잠깐 그 순간을 기다렸다. 천막 틈사이로 들어온 빛이 저만치 앉은 꼬마 여자아이의 눈에서 반짝였다. 빛이 반짝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이 반짝인 것이다. 망원렌즈를 들어 아이의 눈을 주시했다. 아이의 눈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큰 눈망울에 상처와 두려움이 들어있다고 느꼈다. 눈 주위로 맺힌 작은 땀방울이 눈물처럼 보였다. 아이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어제, 오늘 이러저러한 사진들을 찍고 있었구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이의 눈이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저 눈에 더 큰 아픔이 새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촌에서 지난 7일 만난 한 아이의 눈에 상처와 불안이 스며있는 듯하다. /강윤중 기자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촌에서 지난 7일 만난 한 아이의 눈에 상처와 불안이 스며있는 듯하다. /강윤중 기자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의 눈에 빛이 들어와 반짝였다.  /강윤중 기자

난민촌에서 만난 아이의 눈에 빛이 들어와 반짝였다. /강윤중 기자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 ‘눈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 사진의 울림이 적어도 내겐 꽤 오래갈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이날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노트북에 사진을 띄워놓고 아이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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