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와 ‘보수’

2014.02.24 20:45
강상중 | 일본 세이가쿠인대 교수

예전에 프랑스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 전 당수와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신념의 우익정치가인 르펜 당수는 당시 프랑스를 뒤흔든 이민계 청년들의 폭동을 격하게 비난하면서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일본 언론에서 르펜은 ‘극우’그룹으로 분류되고 있고, ‘보수’라는 말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르펜이 탐내며 지켜보고 있는 일본의 극우정치가들은 일본 언론에서는 ‘보수’그룹으로 분류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도쿄가 재난을 당할 경우 ‘제3국인’이 발호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의 발언은 간토대지진 당시 ‘한국인 학살’의 악몽을 상기시키는 민족차별적인 악의로 가득차 있다. 르펜과 이시하라, 어느 쪽을 더 ‘극우’라고 불러야 할지는 명백하다. 그런데도 일본 언론에서 르펜은 ‘극우’, 이시하라는 ‘보수’로 통한다.

[강상중칼럼]‘극우’와 ‘보수’

우익보다 더 오른쪽에 위치한 ‘극우’와 리버럴(자유주의)도 포함한 ‘보수’와는 천양의 차가 있다. ‘극우’란 자민족 중심의 국가관과 역사관에 함몰돼 배외적인 내셔널리즘을 고무하려는 협량한 정치적 스탠스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보수’는 역사의 지혜를 배워 진보나 혁명을 부정함과 동시에 역사의 점진적 변화와 전통을 중시하며 이런 견지에서 타국과의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정치적 입장으로, ‘극우’의 원리주의적인 내셔널리즘과는 명확히 다르다. 이런 구별이 있는데도 일본 언론에서는 이중잣대가 적용돼 르펜은 ‘극우’로, 이시하라는 ‘보수’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는 어떤가. 일본 국내에서는 아베 총리를 ‘극우’ 정치가라고 단정하는 주요 매체는 없다. 그렇지만 과연 아베 총리는 ‘보수’인가, ‘극우’인가. 아마 ‘극우’냐 ‘보수’냐는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일본 언론이 아베 총리를 ‘극우’ 정치가로 부른다면, 여론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이 가능할까.

아베 총리가 보수인지 우익인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아베 총리가 등용했거나 혹은 측근으로 중용되는 인맥의 언동이다. 열렬한 아베 동조자로 아베 총리의 천거로 NHK 경영위원에 발탁된 작가 햐쿠타 나오키는 전시하의 난징대학살을 날조라고 주장하고, 도쿄재판(극동군사법정)을 미국이 원폭투하 등의 학살행위를 덮기 위해 꾸민 정치극이라고 단죄한다. 더욱이 아베 총리의 측근인 에토 세이치 총리보좌관은 최근 동영상사이트의 투고를 통해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실망’했다고 밝힌 미국 정부를 비판하면서 오바마 정권은 왜 동맹국인 일본을 중시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이런 햐쿠타와 에토 등 아베 총리 측근과 주변에서 들리는 것은 ‘역사수정주의’로 간주되는 극우적인 의견들뿐이다. 이런 목소리가 아베의 본심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내 ‘극우’적 역사수정주의자가 염원하는 ‘자학사관’의 극복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자학사관의 핵심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도쿄재판사관’을 가리킨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로 심판한 극동국제군사법정에 많은 불충분한 점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쇼와 천황의 면책을 전제로, 죄형법정주의를 무시하고 사후적으로 만든 죄목으로 전범을 심판한 도쿄재판은 불충분한 점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도쿄재판의 판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량학살과 비인도적인 살육을 심판하는 데 중요한 전례가 돼 지금도 역사적 의의는 살아 있다.

아베 총리 등 극우 정치가와 저널리스트, 작가와 경제인, 민간인의 염원이 ‘자학사관’의 부정, 즉 도쿄재판사관의 부정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도쿄재판의 판결 수용을 전제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고, 따라서 ‘반미’로 귀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역사문제의 본질은 한국·중국과의 대립에 있기보다, 그 핵심에 있는 것은 미국과의 갈등이나 다름없다.

미국과의 갈등 혹은 ‘반미’라는 본심이 아베 정권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새어나오고 있는 것에 아베 정권의 위태로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베노믹스라는 경기부양에 가려 있지만 아베 정권의 본심에는 ‘극우’적인 역사수정주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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