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기술이 세계관을 바꾼다

2018.03.28 20:41 입력 2018.03.28 20:42 수정

[기자칼럼]측정기술이 세계관을 바꾼다

18세기 대항해시대, 지리적 발견을 가능하게 한 것은 마젤란, 콜럼버스 등으로 대표되는 모험가의 목숨 건 도전이 아니었다.

배가 안전하게 더 멀리 갈 수 있었던 것은 온도계의 발명 덕분이다. 17세기 초, 기초적인 온도계가 발명됐고 18세기 들어 온도를 보다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됐다. 항해사들은 이를 이용해 해수 온도를 잴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던 해도에 온도가 다른 해류의 흐름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배들은 보다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과학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측정기술의 발달은 세계관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는다.

메이저리그는 지난겨울 ‘혹독한 구조조정기’를 겪었다. 이전까지 자유계약선수(FA)라는 수식어는 ‘비싼 몸값’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지난겨울은 달랐다. 30대 초중반의 FA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FA 최대어 중 하나였던 3루수 마이크 무스타커스(30)는 소속구단 캔자스시티의 퀄리파잉오퍼(1년 1740만달러)를 거절했다. 퀄리파잉오퍼란 메이저리그에서 FA들의 보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장치다. 선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FA 자격을 얻고, 원소속팀은 이듬해 신인 드래프트 때 보상 지명권을 받는다.

무스타커스는 홈런을 38개나 때렸다. FA 시장 전문가들은 적어도 5~6년에 8000만~1억달러 정도의 대형 계약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무스타커스를 원하는 구단이 없었다. 무스타커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친정팀 캔자스시티와 1년 650만달러에 계약했다. 퀄리파잉오퍼 금액보다 1000만달러 이상 줄어든 것은 물론, 직전 시즌 연봉(870만달러)보다도 220만달러가 깎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FA들이 찬밥 신세가 됐다. 당황한 메이저리그 선수노조는 플로리다에 ‘실업자 FA’를 위한 스프링캠프 무대를 마련했다. 이들은 이름 없는 유니폼을 입고 외인구단처럼 훈련했다.

메이저리그는 더 어린 선수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2017시즌 메이저리그 홈런은 모두 6105개였다. ‘약물의 시대’였던 2000년의 5693개보다 더 많았다. 젊은 선수들의 힘이었다. 2000년 대비 2017년 기록에서 25세 이하 선수들이 때린 홈런 숫자 비율이 무려 55%나 늘었다. 25세 이하 젊은 선수들은 점점 더 빨라지는 투수들의 공에 반응할 힘과 순발력을 지녔다. 부상 위험은 나이와 비례한다. 젊은 야수들의 부상 위험성은 베테랑보다 적다. 무엇보다 FA 자격을 얻기 전이어서 몸값이 싸다.

유일한 약점은 ‘경험’이다. 베테랑들은 오랜 경기 경험을 바탕으로 슬럼프를 빠져나가는 노하우를 지녔다. 상대의 허를 찌를 줄도 안다. 어떤 상황에서 투수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구단들은 베테랑들의 경험을 평가절하했다.

측정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수의 능력 판단은 ‘눈’과 ‘감’에 의존했다. 공끝의 힘이 떨어졌다는 판단은 감독·코치의 눈과 포수가 가진 손의 느낌이 했다. 이제 메이저리그 30개 구장에 레이더가 설치됐다. 눈이 보지 못하는 100분의 1초 동안 몇 ㎜의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류현진이 올 시즌 커브의 회전수를 분당 2400회에서 2600회 이상으로 끌어올리려 시도하는 것도 레이더의 측정 때문에 가능했다.

베테랑 홀대, 젊은 선수 우대라는 결정은 수년간 쌓인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측정 데이터가 베테랑의 경험을 대신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야구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100년 넘게 야구를 지배했던 느낌과 감은 새로운 측정기술과 그에 따른 데이터가 대체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옛날에 해봤더니”라는 말은 더 이상 소용없다는 뜻이다. 청춘들을 향한 “너희들이 뭘 알아”라는 말도 유효기간이 끝났다. 정작 뭘 모르는 건, 우리 어른들이다. 오랜 영화 제목처럼, 더 이상 경험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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