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의 내맘대로 본다

동안보다 동심

2018.04.14 11:47
방송인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

‘세월이 비껴간 얼굴’ ‘방부제 미모’ ‘동안 지존’….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사진을 소개하며 인터넷 매체에서는 이런 제목을 단다. 자글자글 주름지고 수심깊어 보이는 얼굴보다 신선하고 젊은 분위기의 얼굴이 확실히 보기좋다.. 나도 한 살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흰머리를 염색하고 홈쇼핑에서 얼굴 주름을 펴준다는 마사지 기구를 사서 가끔 사용한다. 물론 큰 효과는 없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꼭 내 얼굴에서 세월이 비껴가야할까. 시간이나 세월이 의미없이 흘러간 것만은 아니고 내가 따박따박 걸어온 발자국과 내가 비운 밥그릇의 수는 그만큼의 경험과 지혜를 선물했는데 아닌척 내숭을 떨어야할까. 묵은 김장김치를 꽃무늬 상자에 담는다고 겉절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마전 한 여성을 길에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애매한 표정을 짓자 살짝 당황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한동안 안본 사이에 주름살제거 수술과 입술에 필러 시술을 해서 인상이 변해있었다. 너무 팽팽한 얼굴과 지나치게 도톰한 입술이 동안으로 보이긴 했지만 괜히 어색하고 불편해 안부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최근 <다시 태어나도 우리>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최강 동안’을 발견했다. 영화의 배경은 인도 북부 라다크 삭티란 곳이다. 이곳은 8개월간 겨울이 지속되는 척박한 마을이라 외지인이 잘 오지 않는다. 이 마을에 탯줄을 몸에 염주처럼 감고 태어난 앙뚜란 사내아이는 라다크 밖의 세상은 전혀 모르는데도 말을 배우자마자 “전생에 티베트 사원 ‘캄’에서 제자를 거느렸다”란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그가 전생에 캄의 고승으로 지난 생에 못 다한 업을 잇기 위해 몸을 바꿔 태어난 티베트 고승, 살아있는 부처’로 불리는 ‘린포체’라고 믿는다. 특히 마을에서 의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행자 우르갼은 어린 소년 앙뚜를 ‘린포체’로 곁에서 극진히 모시며 밥도 먹이고 옷도 입히고 불경이나 몸가짐을 지도한다.

앙뚜는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의 귀여운 소년이다. 린포체인데도 좀처럼 자라지 않는 작은 키를 부끄러워하고 학교 시험 성적을 걱정하고 “가짜 린포체에 사기꾼”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고 “이젠 전생의 일이 잘 안 떠오른다”고 한숨짓는다. 라다크의 청명한 하늘처럼 밝고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함이 마냥 사랑스럽다. 그런 앙뚜를 60세나 더 나이많은 우르갼은 경어를 쓰고 지극정성으로 받든다. 매일 주저 앉아 앙뚜의 신발을 매일 헝겊으로 닦아주고 곧 제자들이 찾아와 진정한 린포체임이 밝혀질 거라고 다독거린다. 전생에 고승이었다는 앙뚜가 머물었다는 티베트의 사워 캄을 찾아 두 사람이 떠나는 여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나는 진짜 소년 앙뚜가 아니라 칠순이 가까운 우르갼에게서 동안을 발견했다. 의사이고 수행자인 그는 우리나라 어느 산골의 이장님, 혹은 고향의 오촌당숙 어른같이 생겼다. 말투도 어눌하다. 가난한 살림에 돈을 벌기 위해 먼 길을 떠나 환자를 돌보고와서 지쳐하는 모습, 어떻게 해서라도 린포체에게 번듯한 사원과 제자를 찾아주겠다는 사명감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산행을 할 때의 뒷모습은 분명 영감님이다. 하지만 앙뚜와 함께 있을 땐 앙뚜의 눈높이로 같이 키득거리며 장난도 치고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다. 남루한 옷차림에 주름진 얼굴인데도 앙뚜와 배를 잡고 웃을 수 있는 그의 동심은 그를 진정한 동안으로 느껴지게 한다. 꼬마 소년의 말과 행동에 배를 잡고 웃을 수 있다면 그도 소년이다. 적어도 마음만은.

고집과 탐욕이 가득하면 그 어떤 성형수술이나 화장법으로도 진짜 동안의 분위기가 나오지 않는다. 동심은 감탄에서 나온다.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 꽃잎 하나에 기꺼이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우와, 멋지다” “야호, 신난다” “아이 좋아” 등 아이같이 감탄사를 연발할 때 우리 안의 어린이이가 온 몸과 얼굴을 동심으로 물들인다. 덮어둔 책을 펼치듯 내 가슴의 동심을 꺼내면 된다.

몇년 전 어린이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배우 장미희씨를 인터뷰하며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없는데 어린이영화제를 잘 진행할 자신이 있나”라고 멍청한 질문을 했다, 그는 살짝 웃으며 “우린 모두 ‘전직’ 어린이잖아요. 누구나 어린 시절은 있었죠”라고 답했다.

고단한 삶은 한숨과 주름을 남긴다. 주변사람들도 다 짜증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넘어져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서고 새 운동화 하나에도 폴짝폴짝 뛰며 신나했던 ‘전직’ 어린이 시절을 떠올려본다. 우르갼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귀여운 동심의 어른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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