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

2019.06.02 16:15 입력 2019.06.02 16:59 수정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자신을 미 육군 정보요원이라며 5·18 관련 남아있는 모든 의문들을 단숨에 답해버린 김용장. 그러나 이 꿈 같은 증인은 그가 주장한 것처럼 501 군사정보단의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으로 근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했고, 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

지난 3월 언론에 처음 나온 이후, 김씨는 501 정보단의 직책을 물증으로 밝힌 적이 없다. 5월 21일 전두환 명예훼손 소송 참고인으로서 검찰에 제출한 증명은 김씨가 20년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일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한다. 첫 증거는 우연히 드러났다. 5월 16일자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잠시 비친 김씨의 부대 표창은 그가 민간인 통역관임을 적시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에 잠시 비친 김용장씨의 표창장 사진. 확대해서 보면 그의 직책이 ‘언어전문가(통역관)’로 돼있다. 출처: JTBC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에 잠시 비친 김용장씨의 표창장 사진. 확대해서 보면 그의 직책이 ‘언어전문가(통역관)’로 돼있다. 출처: JTBC

나는 미군 당국에 몇 차례 정보공개 요청을 통해 INSCOM에는 김씨가 작성했다던 보고가 존재하지 않고 민간군속이었던 그의 인사 기록은 세월이 지나, 타 기관에 이첩된 가능성을 확인했다.

김씨의 근무기간과 주장을 전해들은 INSCOM 공보국은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씨의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는 나와 전화 통화에서 김씨를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부대 활동에 대해 일절 함구했지만,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냐는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

반면, 김씨는 나와 통화에서 501 부대가 필요에 따라, 통역(I/T), 언어전문가(linguist), 또는 군사정보관(MIS)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썼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사무실 고유코드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미군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에 미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가 INSCOM에는 민간군속이었던 김용장씨의 인사 기록이 없고, 어쩌면 세월이 지나 타 기관에 이첩된 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해온 서한. 설갑수씨 제공

미군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에 미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가 INSCOM에는 민간군속이었던 김용장씨의 인사 기록이 없고, 어쩌면 세월이 지나 타 기관에 이첩된 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해온 서한. 설갑수씨 제공

김씨가 자신의 신분을 속였다고 해서 미군 정보기관에서 통역으로 일한 이상 그의 증언을 모두 위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언론에 나올수록 그의 위증도 드러났다.

김씨는 전두환이 80년 5월 21일 광주 기지에 왔다는 것은 자신의 정보원이 전해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여러 차례 말하며 당시 비행계획을 찾아보라고 강조했다. 당시 광주 공군기지는 한미 공군의 공동관할로 미군 정보조직은 한국 측 조력자 없이도, 광주 기지의 비행계획과 탑승객명단을 쉽게 확인할 위치에 있었다.

김씨의 주장이 나오기 전부터, 전두환은 80년 5월 21일 오전 11시2분 용산 미군기지에서 헬기에 탑승, 광주 기지에 오후 12시55분 도착했다고 의심 받아왔다. 새로운 주장이 아닌 것이다. 국회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전두환이 탑승한 헬기의 비행계획을 확인했냐고 묻자, 김씨는 확인 여부에 대해 확답을 피하고 비행계획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수송기로 광주기에 도착한 편의대를 목격했다고 말했으나, 그들의 비행계획을 확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살 명령을 내린 전두환의 광주 비밀 방문과 시위대를 선동할 편의대 출현의 물증 확인 여부에 대해 얼버무린 셈이다.

광주 기자회견에서 김씨는 계엄군이 발포가 아닌, 사살 명령을 받았다고 자신의 보고가 80년 5월21일자 DIA 문건에 반영됐다고 말했다. 또한 이러한 민감한 부분을 공개한 것은 DIA의 실수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DIA는 실수하지 않았다. 김씨가 언급한 DIA 보고서는 사살 명령이 아니라, 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후 계엄사가 뒤늦게 발동한 자위권에 관한 것이었다. 계엄사의 공식 동향을 DIA가 검열 삭제할 이유는 없다.

김용장씨가 광주 방문 중이던 지난 5월21일 전두환 명예훼손 소송 참고인으로서 광주지검에 제출한 미국 정부 20년 근속 확인증서. 뉴시스

김용장씨가 광주 방문 중이던 지난 5월21일 전두환 명예훼손 소송 참고인으로서 광주지검에 제출한 미국 정부 20년 근속 확인증서. 뉴시스

또 다른 위증은 다름 아닌 5월18일에 나왔다. 그는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광주는 신군부의 시나리오였고, 미국이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5·18 항쟁 사나흘 전 미 국방성 명령으로 광주에서 미국 민간인을 철수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5월 항쟁 이전과 항쟁 기간 열흘 내내 미국은 소개 명령이나 계획을 실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10세 막내딸과 광주에 남았던 미국 선교사의 증언이다. 그녀는 시위가 격화될 즈음 대사관에서 광주를 떠나라는 전화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만 5월22일 유혈사태를 염려한 미 공군 상사가 양림동 외국인 마을에서 선교사와 가족들을 헬기로 공군기지로 소개하려는 계획을 타진했으나, 선교사들은 거부했다.

그런데 5월20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김씨는 80년 5월22일에 소개 계획이 있었다고 별 다른 설명 없이 말을 바꿨다. 동석한 80년 당시 보안사 특명부장이자 김씨의 학교 후배라는 허장환은 5·18 사나흘 전에 외국인을 소개시키라는 명령을 보안사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뒤집은 주장을 허씨가 되살린 꼴이었다.

김씨는 당시 광주에 미 문화원 원장이 남아 있었다고 덧붙였다. 지난 3개월동안 그가 줄곧 해왔던 미 국무성 직원이 광주에 없었다는 주장을 해명없이 뒤집는 순간이었다. 문화원(USIS)이 국무성 소속이라는 것을 미 정보부대에서 일한 김씨가 모를 리 없다.

석달간 김씨의 거짓 주장과 거짓 신분이 한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받아쓰기만 열중한 언론 때문이었다. 특히 지난 3월 김씨를 최초 인터뷰한 JTBC ‘스포트라이트’의 5월16일 방송분은 김씨에게 없는 알리바이라도 만들어 줄 듯한 기세였다.

5월16일자 방송이 인터뷰한 80년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자 DIA 요원인 제임스 영은 김씨의 주장을 줄곧 부정했다. 김씨 주장과 달리 영은 광주 공군기지에 4명이 아닌, 2명의 요원이 있었고, 501 정보단이 전국에 11개가 아닌 약간(several)의 필드오피스(field office)를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은 또한 항쟁 기간동안 501 부대가 기지 내에 한정돼 있었고, 몇몇 짧은 상황보고(Spot Report)만 보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적당히 얼버무린 자막과 내레이션만 좇다 보면 이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영이 김씨를 만난 적도 알지도 못했다고 말한 것을 확인한 나조차도, 16일자 방송만 보자면 영이 김씨를 안다고 했는지 모른다고 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얼토당토 않은 번역과 분석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는 80년 5월8일자 DIA 문건을 비추며, 머리 기른 특전부대가 학생시위 진압에 동원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은 특전대가 한 대학 근처에 배치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살 명령부터 편의대까지 김씨의 위증은 ‘5·18은 전두환 집권을 위한 신군부의 완벽한 시나리오’라는 보안사 상사 허씨의 주장에 완전히 부합한다. 이 주장대로라면,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불과 수백명의 전두환 편의대의 선동에 휘둘려 방송국을 불 지르고, 무기고를 습격하고, 편의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뒤쫓아 관공서나 점거한 한 무리의 몰지각한 군중에 불과했다. 이런 류의 주장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침투설의 뒤틀린 거울상에 불과하다. 항쟁이 600명 북한 특수부대가 벌인 게릴라전에 ‘광주인’들이 부화뇌동한 사건이라는 왜곡이나, 5·18을 사전 시나리오라고 보는 시각 모두 80년 5월 닷새 동안 계엄군의 폭력과 싸우고, 또다른 닷새 동안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며 버틴 광주시민의 자발성과 양립할 수 없다.

내년이면 광주 항쟁 40주년. 수많은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증인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증언과 증거들은 쇠락해 간다. 더 이상 검증 없는 주장과 거짓에 5·18 진상규명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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