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동래성 사람들 처참한 죽음”

2008.11.20 00:38

부산 동래읍성 해자서 출토된 유골 분석 ‘충격’
5세 미만 유아 조총 공격에 즉사…20대여성 칼로 무참히 살해된듯

“320㎡(97평)에 불과한 해자 조사구역에서 발견된 인골만 해도 최소 81개체, 최대 114개체입니다. 10~40대 남녀는 물론 5세 미만의 유아까지 살해되거나 처형된 비참했던 현장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동래읍성 해자에서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 320㎡에 불과한 공간에 81~114개체의 인골이 유기되어 있었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동래읍성 해자에서 인골이 출토되는 모습. 320㎡에 불과한 공간에 81~114개체의 인골이 유기되어 있었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 교수는 2005년 5월~2008년 1월까지 경남문화재연구원이 조사한 부산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비참했던 동래성 전투상황을 알려주는 사실들을 속속 밝혀냈다고 19일 말했다.

임진왜란 관련 유적에서 유골이 출토된 것은 동래읍성이 처음이다. 또한 인골의 개체수와 인골에 난 상흔의 성격, 그리고 인골의 형질까지 분석한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분석 결과 동래읍성 해자 밑바닥에 집중된 인골의 수는 확인된 것만 81개체(남자 59개체, 여자 21개체, 유아 1개체)였다. 이번에 분석 대상이 된 두개골 상흔은 절창(切創·칼에 베인 상흔)이 4개체, 사창(射創) 또는 자창(刺創·총이나 활을 맞은 상흔)이 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다. 구체적인 인골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유탄에 맞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5살 미만의 유아의 인골.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다.

유탄에 맞아 희생된 것으로 보이는 5살 미만의 유아의 인골.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다.

적병의 조총공격에 맞아 살해된 5살 미만의 유아 인골이 확인된 것이다. 김 교수는 “두개골에서 확인되는 부정형의 상흔과 상흔의 경사도, 그리고 깨진 정도를 종합하면 이 유아는 일본군의 조총공격에 빗맞았거나 유탄을 맞아 즉사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대 여성의 사인(死因)은 심상치 않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김 교수는 “왜병은 이 여인의 전두부와 두정부를 두 번이나 칼로 내려쳤으며, 특히 전두부의 경우는 예리한 칼로 단번에 완전히 잘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전투 중에 칼을 휘두르면 얼굴 양쪽에 상흔이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 여인의 경우 전두부와 두정부를 잘렸는데, 이는 왜병이 여인을 꿇어 앉혀놓거나 고개를 숙이게 한 뒤 옆에서 칼로 내려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처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밖에도 상흔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과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 등도 확인된다”면서 “이는 칼 이외의 다른 도구로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을 뜻한다”고 전했다. 왜병들은 이렇게 살해한 조선인들을 해자에 한꺼번에 내던진 것이다.

또한 분석된 인골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분석이 가능한 19개체의 남성인골의 평균신장(163.6㎝)이 동시대 일본 에도인(江戶人·155.09~156.49㎝)보다 무려 7~8㎝ 정도 크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또한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이마와 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의 길이 비율)도 동래인과 에도인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3 해자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인골.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이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3 해자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인골.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이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동래성 전투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일본군이 1592년 4월15일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킨 동래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송상현은 “죽더라도 절대 길을 내줄 수 없다”면서 버텼지만 그만 순절했고, 동래성은 함락되고 만다.

1760년 변박(卞璞)이 그린 ‘동래부사순절도(東萊府使 殉節圖·보물 392호)’에는 동래성을 겹겹이 에워싼 왜병들의 모습과 의연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송상현 부사, 그리고 도망 가는 경상 좌병사 이각의 모습 등이 시간대 별로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효종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던 민정중(閔鼎重)이 쓴 ‘임신동래유사(壬辰東萊遺事·1668년 간행)’ 등의 기록을 보면 동래성 전투의 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이 일시에 다투어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대혼란에서 조선군 병사들은 물론 백성들도 막대기와 괭이, 낫, 도끼, 칼 등을 들고 백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은 “동래읍성 발굴 결과는 각종 사서기록이나 ‘동래부사순절도’의 그림과 부합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면서 “이것이 바로 전쟁고고학 분야가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김재현 교수는 동래읍성 인골분석 결과를 21일 창원호텔에서 열리는 경남문화재연구원 개원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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