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광고쟁이 손닿은 남산 아래 골목마다 ‘문화’가 피었습니다

2016.05.06 19:37 입력 2016.05.07 20:49 수정
글 한윤정 선임기자 ·사진 박기호 사진가

박동훈 핸즈BTL 대표의 ‘필동 스트리트 뮤지엄’

경남 산청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지 33년째 되던 해, 서울 중구 필동 핸즈BTL미디어그룹 집무실에 앉아 있던 박동훈 대표(52)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 혼자 누려도 될까.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동네 사람들과 나눠야 하지 않을까.” 필동과 충무로 일대는 10대에 인쇄소 직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가 애니메이션을 배우고 광고를 익히며 지금의 광고회사를 운영하기까지 학교이자 스승이 되어준 곳이다.

서울 중구 필동 핸즈BTL 사옥에서 내려다본 삼거리 풍경. 왼쪽으로 ‘코쿤뮤직’, 오른쪽으로 ‘24번가 서재 남학당’과 ‘24번가 베이커리’가 보인다.

서울 중구 필동 핸즈BTL 사옥에서 내려다본 삼거리 풍경. 왼쪽으로 ‘코쿤뮤직’, 오른쪽으로 ‘24번가 서재 남학당’과 ‘24번가 베이커리’가 보인다.

그로부터 3년. 필동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리 미술관으로 변했다. 남산한옥마을과 옛날 인쇄소들이 모여 있던 남산 1호 터널 주변 골목에 박스 형태의 작은 미술관 8개가 들어섰고 도서관, 공연장, 레스토랑, 베이커리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낡은 집과 상가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도심에서 문화의 향기가 뿜어나기 시작했다.

박 대표가 운영하는 핸즈BTL 사옥이 필동 24번지 현재의 위치로 이사온 것은 2012년이다. 5층짜리 건물을 구입해 리모델링한 뒤 1층에는 레스토랑, 지하에는 쿠킹스튜디오를 만들었다. 1992년 설립된 핸즈BTL은 풀무원, 해찬들 등 식품업계의 매장광고, 프로모션을 주로 해오면서 직원 50명, 연매출 90억원 규모의 업체로 성장했다.

20년의 노력 끝에 임대가 아닌 자체 사옥을 마련한 뒤 박 대표는 회사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보았던 유명 미술관이 떠올랐다. 자신은 철들어 전시회 도록을 만들면서 처음 미술 작품을 접했는데 이 동네 아이들은 일부러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거리에서 작품을 마주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런던에서 보았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인상적이었다. 미술관과 동네의 경계 없이 예술이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회사 건물이 있는 작은 삼거리에 1호 미술관 ‘모퉁이’가 2014년 12월 문을 열었다. 기획재정부에서 130만원에 구입한 1평 땅이다. 쇼윈도형 유리 조형물 안에 작품을 넣고 작가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세웠다. 2호 ‘우물’, 3호 ‘이음’, 4호 ‘골목길’은 남산한옥마을 우측 순환도로변에 자리 잡았다. ‘우물’은 사각형 우물 형태로 만들어 밑을 내려다보게 했다. ‘이음’은 한옥의 기와, 서까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골목길’은 미술관 안에 또 하나의 작은 미술관이 들어 있다.

‘사변삼각’

‘사변삼각’

한옥마을 후문을 빠져나오면 남산 1호 터널에서 내려오는 도로변이다. 도로를 따라 걸어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삼익아파트가 나온다. 5호 ‘둥지’와 6호 ‘사변삼각’은 이 아파트 주변에 숨어 있다. 나뭇가지로 지은 새 둥지처럼 생긴 ‘둥지’는 육교 밑이다. 국토교통부로부터 불하받아 둥지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양쪽으로 작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아파트가 소유한 공지였던 ‘사변삼각’은 삼각형 땅에 사각형 전시공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높이가 6m나 돼 큰 작품이 들어갈 수 있다.

사옥에서 시작해 남산한옥마을을 통과한 뒤 다시 사옥으로 이어지는 시계방향 고리형태로 미술관이 세워졌다. 이어진 7호 ‘컨테이너’는 지하철 충무로역 4번 출구와 가까운 도로변에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해 만들었고 8호 ‘벽’은 한옥마을 주차장 한쪽에 마치 관리실 모양으로 서 있다. 한 점씩 들여다보면서 30~40분에 걸쳐 8개 미술관을 돌고 나면 묘한 충만감이 든다. 화이트 큐브에 모아놓은 작품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스트리트 뮤지엄을 만들면서 필동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시대 관립 교육기관 사학(四學) 중 하나인 남학당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더군요. 현대에는 영화, 광고, 사진, 인쇄가 발전했던 장소고요. 이런 필동의 역사적 맥락을 살리면서 재개발이 아닌 재발견을 추구했습니다.”

작은 미술관을 짓겠다는 당초 그의 계획은 조금씩 커졌다. 사옥 1층의 ‘24번가 레스토랑’ 맞은편에 ‘24번가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고 그 옆에는 최근 ‘24번가 서재 남학당’이 들어섰다. 다시 맞은편에는 공연장 ‘코쿤뮤직’이 완공됐다. 사옥, 서재, 공연장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삼각으로 마주 앉은 모양이다. 서재가 조선시대 남학당과 금속활자를 만들던 주자소, 현대 인쇄골목의 전통을 이었다면 복합문화공간인 공연장은 충무로에서 꽃핀 영화, 광고 등 대중문화의 상징이다.

‘컨테이너’

‘컨테이너’

서재 앞에는 이해인, 박찬욱 등의 사진이 붙어 있다. 네이버와 협업한 ‘시 쓰는 수녀 이해인의 서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의 책들이 1층 서가에 꽂히고 강연도 열린다. 2층은 세미나, 문화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연립주택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 3층에서는 기와를 걷어낸 나무 지붕을 볼 수 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술사학자 유홍준씨는 3층 유리에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문구를 써주었다.

누에고치 모양의 은빛 건물 ‘코쿤뮤직’은 아직 큰 무대에 서기 어려운 젊은 뮤지션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무대와 70개 객석이 평평하게 이어졌고 2층에서도 내려다볼 수 있다. 무대 바닥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지하로 옮길 수 있는 승강기가 달려 있다. 영국의 극장에서 나왔다는 빈티지 의자는 옛날 영화관을 떠올리게 한다.

3년여에 걸쳐 조성된 스트리트 뮤지엄과 서재, 공연장은 이제 본격적인 운영을 앞두고 있다. 박 대표는 “계획보다 일이 커졌다. 주변에서 많이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민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건물 짓는 비용이 들어갈 때는 한 달에 7000만원, 운영비만으로도 2000만~3000만원이 꾸준히 들어간다. 광고업이 하향세를 타는 요즘, 중견업체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정착시키겠다는 생각이 그를 끌고 가는 힘이다.

전시를 위해 많은 작가들이 힘을 보탰다. 최울가 작가를 시작으로 강형구, 백남준, 그레고리 스콧, 김종구, 강병인, 김소연, 최정윤, 강주리 등 1년 반 사이에 30여명의 작품이 선보였다. 작품비는 따로 못 주고 보험과 운송비, 식음료를 제공한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씨는 스트리트 뮤지엄의 서체와 로고도 만들어주었다. 걸으면서 본다는 뜻으로 세로 획의 끝이 왼쪽으로 꺾여 걷는 발처럼 보인다. 향후 계획은 2년 안에 서애로와 1호 터널 도로변을 중심으로 스트리트 뮤지엄을 24개까지 늘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만든 스트리트 뮤지엄의 디자인은 모두 박 대표의 솜씨다. 앞으로 4개를 직접 더 만들고 나머지 12개는 건축가들에게 의뢰해 그들의 이름을 단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미술관뿐만이 아니다. 서재와 공연장, 레스토랑과 카페의 디자인도 그의 작품이다. 전방위 디자인은 놀랍게도 독학으로 쌓은 실력에서 나왔다.

‘골목길’

‘골목길’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서울로 돈 벌러 간 어머니 대신 고향의 외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와보니 호떡장사를 하던 어머니는 집도 없이 수레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 처음 동네 형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폐지를 줍다가 충무로 인쇄소에서 스티커를 떼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폐지에서 재미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하청받아 제작하던 회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곳으로 찾아가 종이 나르는 일부터 하다가 애니메이터가 됐다. 그러나 단순작업에 싫증이 나 3년 만에 그만뒀다.

식당을 차리고 싶던 그는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사장이 주방일을 맡으라고 하자 다시 그만두고 인쇄골목으로 돌아왔다. 1986년 보드에 광고물을 붙이는 회사에 들어갔다. 광고와 디자인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등으로 경기가 좋고 광고 수요도 늘던 시점이어서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면서 광고와 홍보, 디자인 실무를 익혔다.

이렇게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우는 동안 정규교육은 예림미술고 2학년을 중퇴한 게 전부다. 처음 들어갔던 덕수상고의 미술 교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한호림 선생님이었는데 그에게 미술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돈 때문에 중퇴했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손재주와 타고난 눈썰미를 바탕으로 디자이너, 기업가로 성공했다.

‘둥지’

‘둥지’

“미술대학 졸업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오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직원에게 계산해 보라고 했습니다. 수억원은 들었겠더라고요. 나는 그걸 필동에서 배웠으니 이 동네에 환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영화, 광고, 사진, 인쇄 분야의 기념관을 하나씩 지으려고 생각하다가 어느 분야든 순수미술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생각에 미술관으로 돌렸다.

바닥부터 일을 배웠듯이 필동 타운 프로젝트도 바닥부터 시작했다. 먼저 필동 주민자치위원회에 들어갔다. 스트리트 뮤지엄을 ‘마을공동체 사업’에 응모해 2등 상금으로 250만원을 지원받았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훌륭한 내용이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으므로 1등이 아닌 2등상을 주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몽상은 현실이 됐다. 박 대표는 “내 별명이 원래 미친놈, 똘빡”이라고 했다. 지난 삶이 이를 대변한다.

그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채 골목을 뛰어다닌다. 하드웨어가 웬만큼 완성됐으니 소프트웨어를 채울 참이다. 기업에서 하는 일인 만큼 사업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의 눈길도 많다. 그래서 ‘멍석’이란 이름의 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면서 예술가와 주민들의 관심 및 지지를 모으기 위한 ‘필동 골목축제 예.술.통’(19~21일)도 준비하고 있다. 한 개인의 결심이 ‘퇴락한 충무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놀라운 현장이다.

■박동훈

[집이 사람이다] (17) 광고쟁이 손닿은 남산 아래 골목마다 ‘문화’가 피었습니다


1964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79년 서울로 왔다. 인쇄소, 식당에서 일하면서 덕수상고를
거쳐 예림미술고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했다. 1986년 광고업계에 들어온 뒤 POP뱅크 디자인팀장을 거쳐
1992년 핸즈BTL미디어그룹의 전신인 POP핸즈를 설립해 주로 식품업체의 매장광고, 프로모션을 맡았다.
2013년부터 스트리트 뮤지엄을 비롯한 필동 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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