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권 9년의 적폐

2016.06.03 21:13 입력 2016.06.03 21:16 수정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정비하다 사망한 김모씨(19)의 어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이 강하고 떳떳하고 반듯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이에게는 절대 그렇게 가르치며 키우지 않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책임감이 강하고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에게 개죽음만 남을 뿐입니다. 첫째(아이)를 그렇게 키운 것이 미칠 듯이 후회됩니다.”

[기자칼럼]보수정권 9년의 적폐

그 어머니가 말하는 김씨 모습은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말을 믿고 따랐다가 차가운 바다에 수장된 세월호 아이들과 겹친다. 그들은 나이도 같다. 세월호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김씨처럼 사회 초년병이거나 대학 새내기일 것이다. 둘 다 착한 것, 성실한 것, 어른들 말을 믿고 따른 것이 죄라면 죄였다. 정직한 것, 반칙하지 않는 것이 패가망신 이유가 되고 죽음의 원인이 되는 사회는 내면 깊숙이 병든 사회다. 사회 규범이 무너지고 신뢰가 붕괴된 자리에선 거짓과 술수와 협잡이 ‘끼리끼리’ ‘짜웅’ ‘짬짜미’ 같은 말을 거느리고 독버섯처럼 자란다.

유명한 검사장 출신 홍만표 변호사는 석연치 않은 변론으로 수백억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백 수십채의 오피스텔을 사들여 집장사를 하고 탈세했다. 거악을 징치한다는 특수통 검사의 노하우와 인맥을 범죄행위에 활용했다. 홍 변호사는 억울할 것이다. 그는 시쳇말로 재수 없게 걸린 케이스다. 최유정 변호사와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 대표 간 진흙탕 싸움이 없었다면 그가 검찰 수사를 받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명망 있는 법조인이요, 능력 있는 변호사로 남아 음으로 양으로 돈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돈과 명망을 밑천 삼아 장차 국회의원, 장관, 총리가 될 수도 있었겠다. 어쩌면 시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청년들에게 정직하게 땀 흘려 노력하라고 훈계할 수도 있었을 게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전관예우, 논문표절 따위가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고위 공직자의 기본 스펙이 된 지 오래다. 위선과 기만, 후안무치와 이중잣대. 이것이 우리 사회의 정신적 풍경이다.

‘반칙을 해서라도 남을 짓밟고 올라서면 된다’는 천민 신자유주의적 삶의 태도를 선도한 건 정부·여당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와 과정의 정의를 중시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 국가정보원은 현 집권세력을 위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같은 시기 새누리당 실세들은 불법으로 유출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침소봉대하며 색깔론을 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선거에서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칙을 일삼았다.

그래놓고도 이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명백하게 드러난 불법행위를 제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법의 단죄를 받지도 않았다. 공안검찰은 2급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불법으로 유출해 선거에 활용토록 한 새누리당 정문헌 전 의원을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하는 데 그쳤다. 국가기밀을 불법으로 빼내 선거에 악용해도 벌금 500만원만 물면 된다는 것이 검찰에서 선거사범을 전담하는 공안검찰의 판단이다.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하면 불법을 저지르라고 검찰이 권장한 셈이다. 정부가 앞장서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것이다. 공익은 집권세력의 사익에 압도됐다. 그런 정부를 시민들이 신뢰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보수정권 9년을 거치면서 사회는 한층 천박하고 비열해졌다. 염치를 잃은 사람들은 오늘도 ‘완장질’을 하며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공동체는 붕괴됐고, 사회는 더 위험해졌다. 경제 사정은 나빠졌고, 일자리는 줄었으며, 남북관계는 악화됐다. 민주주의는 후퇴했고, 언론자유는 퇴보했다. 청년들은 미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지난 9년간 무엇 하나 좋아진 것이 없다. 사회는 폐허가 됐다. 그 폐허에서 정직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오늘도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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