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하고 싶지만 못하겠습니다”

2018.03.03 15:18 입력 2018.03.03 15:44 수정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경찰과 사법부로부터 2차 피해 두려워
배우 김여진씨가 지난 2월 25일 “제가 아는 한국여자의 90% 이상에 성추행·성희롱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남자들이 떨고 있겠죠”라는 트윗글을 남겨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크게 회자됐다. 대한민국 여성 10명 중 9명, 즉 대다수의 여성들은 경미한 수준일지라도 한 번씩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지적은 많은 공감을 샀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피해사실을 외부에 알리거나 고소·고발을 하지는 않는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의 고발 이후 각계각층에서 폭로되는 다양한 사건들은 대부분 짧게는 수년 전, 길게는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서 검사의 폭로 역시 성추행이 발생한 지 8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피해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거나,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한다. unsplash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피해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거나,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한다. unsplash

성폭력범죄 신고율 2.2%에 그쳐

우문을 던져본다. 왜 성폭행 피해자들은 사건 발생 당시 즉각적으로 항의하고, 가해자를 고소하지 않은 것일까. 미투운동이 확산되면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질문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2차 가해는 여전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해자는 수사기관과 사법부다.

#. 준강간 피해를 입은 ㄱ씨는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검찰은 오히려 ㄱ씨를 무고죄로 기소했다. 뿐만 아니라 암치료를 받고 있는 ㄱ씨가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ㄱ씨의 어머니에게 연락해 딸의 강간 피해사실을 알렸다. 또 ㄱ씨가 고의로 피해사실을 지어내 고소한 정황이 있다며 “이러면 따님이 무고죄로 재판 받게 된다”고 노모를 겁주기도 했다. 담당검사는 조사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자에게도 “좋으면서 ‘싫다, 싫다’라고 표현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 ㄴ양과 친구 3명은 “다이어트 주사를 맞으면 살이 빠진다”는 의붓아버지의 말에 속아 약물을 투여,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강제추행 및 유사강간을 당했다. 이 사실을 인지한 학교 관계자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의붓아버지의 단순 괴롭힘으로 판단, 제복을 입은 채로 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 조사를 벌이는 등 2차 피해를 일으켰다.

#. 직장 내 성추행사건 피해자인 ㄷ씨는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했다가 판사로부터 심한 모욕감을 받았다.

판사는 ㄷ씨에게 “가해자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했습니까” “남자친구가 근처에 있었는데 왜 부르지 않았습니까” “성추행 이후 곧바로 도망가지 않고 가해자를 왜 먼저 택시에 태워보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상황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ㄷ씨가 취한 행동들이 법정에서 오히려 비난으로 돌아온 것이다. 위 사건들은 지난 1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선정한 성폭력 수사·재판과정에서의 인권보장 시민감시단 걸림돌 사건 중 일부분이다.

미투운동이 폭발적으로 번지고 있지만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고소하기를 꺼린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성폭행 등의 폭력행위들이 대부분 직장이나 학교·가정 등 공동체 영역에서 발생하고, 피해사실을 폭로할 경우 자신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될까봐 두려운 것이 고소를 꺼리는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정작 고소를 해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2차 가해행위 역시 장애물로 작용한다. 성폭력 친고죄가 폐지되기 전인 2010~2012년 성폭력범죄 신고율은 2.2% 안팎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명신 경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작성한 <성폭력 수사에 있어 2차 피해 과정: 남성 경찰관을 중심으로> 논문(교신저자 양난미)을 살펴보면 남성 위주의 경찰관들이 성폭력에 대해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해당 조사는 경남 3개 중소도시에 소재하는 경찰서, 파출소, 지구대 근무 경찰 940명을 대상(응답률 45%)으로 실시됐다. 연구대상자의 연령은 만 27세에서 만 58세까지 다양했다.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7명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7명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범죄 입증할 물적증거 확보 어려워

해당 논문에 따르면 경찰은 비교적 낮은 수준이지만 일정 정도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피해자가 거부의사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았다면 성폭력으로 볼 수 없다’고 답한 경찰관은 전체 응답자의 24.7%에 달했다. 또 ‘(애정관계가 전제된) 데이트 과정에서의 성폭력은 동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로 볼 수 있다’고 답한 경찰관도 20.3%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비난 가능성 부분이다. 은연중에 성폭행 책임을 피해여성에게 떠넘기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성폭력에 대한 편견이 높을수록 경찰은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의심하게 되며, 그 결과 성폭력사건을 적극적으로 수사하고자 하는 의지가 약화된다”면서 “‘진짜 강간’과 ‘진짜 피해자’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보여질 때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불신하고 비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실제 설문 중 ‘여성의 심한 노출로 인해 성폭력이 발생한다’에 찬성하는 비율은 53.8%에 달했다. ‘술취한 여성이 성폭행당한 경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 ‘밤거리를 혼자 걷다가 성폭행당한 여성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몸가짐이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한다’는 등 피해여성을 비난하는 경향의 문장에 대해 응답자의 20.3~37.4%가 찬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교수는 “성폭력을 당한 피해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다소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해당 조사에서는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성폭행 가해자가 됐을 경우 피해자의 말보다 가해자의 말에 더 신빙성을 가지거나(12.1%), 가해자가 이전에 피해자를 향해 다른 형사적 위협이 전혀 없었을 경우 여성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22%)고 응답한 경찰도 있었다. 미투운동으로 폭로된 영화배우 오달수씨나 세종대 김태훈 교수 등과 같은 성범죄 가해자들이 ‘연애감정을 갖고 있었다’, ‘사귀는 사이’라는 식의 해명을 유지할 경우 조사 담당자가 “일방적인 성폭행이었다”는 피해자의 말을 온전히 믿기 어려울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이 교수는 성폭력 피해자 조사가 어려운 이유로 이 같은 편견과 더불어 ‘성범죄’ 자체가 지니는 특징에도 주목했다. 성폭력범죄는 대부분 은밀한 장소에서 당사자들만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또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가 있었는지 입증할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도 경찰이 의도치 않게 2차 가해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서는 검찰의 기소, 나아가 공소권 유지 자체가 어려울 수 있어 피해자에 대한 질문이 마치 가해자 조사처럼 집요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50% 이상의 경찰이 동기부족으로 인한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90% 이상의 경찰이 증거부족으로 인한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목격자 및 증인 확보의 어려움 ▲근거불충분으로 수사 진척 불가능 ▲법의학(체액 등 DNA 검출물질) 증거 확보의 어려움 등이 수사의 어려움을 극대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수사의 어려움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서울지역 경찰서 여성·청소년 담당 관계자는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사실을 신고하면 최대한 피해자 입장에서 들어주고, 관련 물증 확보에 주력하지만 기소의견으로 사건을 송치하는 데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면서 “수사기관이 피해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가해자가 적절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테지만 피해자에게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더욱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청계 경찰관은 “성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아동부터 성인까지 우선 해바라기센터로 가서 안정적으로 진술하고 상담 받을 수 있도록 권유하는 편”이라며 “담당 수사관은 해바라기센터에서 수집한 증거와 진술을 토대로 추가조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2차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현재는 친고죄가 폐지되면서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더라도 가해자가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지는 않는다. 때문에 피해자가 조사과정에서 발생한 2차 피해나 가해자로부터의 지속적인 합의유도 등으로 인해 고소를 취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피해자가 입은 2차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

대학생 ㄱ씨는 2016년 8월 동아리 선배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ㄱ씨는 증거수집을 위해 가해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연락해 만났다. ㄱ씨는 그러나 가해자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너도 평소에 나에게 관심이 있었지 않느냐”는 등의 말만 들었다. ㄱ씨는 가해자와 헤어진 직후 경찰서로 갔지만 사건접수 담당자로부터 “입증할 증거를 가져와라” “예쁜 아가씨가…”라는 말을 듣고 고소를 포기했다. ㄱ씨는 현재 1년 넘게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피해자의 64.4%가 정신적 고통 호소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낸 <성폭력 피해자 정신건강 현황 및 정책지원 방안>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후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해 34.9%가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라고 답했다. ‘전혀 좋지 않은 편(29.5%)’이라고 답한 비율도 높게 나왔다. 피해자의 64.4%가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는 셈이다. ‘보통(23.8%)’, ‘대체로 좋은 편(8.5%)’, ‘아주 좋은 편(3.3%)’이 뒤를 이었다. 또 10명 중 7명(67.9%)이 성폭력 피해 이후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ㄱ씨는 ‘미투운동이 진행 중인데 피해사실을 폭로할 생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그는 “분명 내가 피해자였는데 나의 피해사실을 의심하는 듯한 경찰의 눈빛과 말들이 2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면서 “또다시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비난 받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조사한 ‘성폭력 법·정책을 통해 본 피해자의 권리’에 따르면 시민감시단이 출범한 2004년부터 10년간 축적된 수사기관·사법기관 모니터링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형사사법절차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 가운데 가장 많은 유형이 ‘담당자들의 성폭력에 대한 이해 및 전문성 부족과 사건 처리에 무성의한 태도 등으로 인한 인권침해’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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