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로 부는 칼바람과 ‘간당간당한 목숨’…비정규직이 사는 법

2019.12.04 21:39 입력 2019.12.05 06:22 수정

한국지엠 노동자 사망과 해고통보로 본 고달픈 삶

지난달 29일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유품. 그의 가방 속에서는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사고로 숨진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모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유품과 같이 컵라면이 발견됐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제공

지난달 29일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유품. 그의 가방 속에서는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사고로 숨진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 직원 김모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유품과 같이 컵라면이 발견됐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제공

창원공장 560명에 최후통첩
“벌써 3번째…이젠 진짜 같아”

홀수달 공장 출근, 짝수달 휴직
생계 위해 쉬는 달 아르바이트
휴일 없이 근무하다가 쓰러져
부인 “그만두라 할걸” 후회

한국지엠의 구조조정 역설을
왜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지

“(정규직 임금의) 반도 못 받고 일하는 우리가 사실 ‘일등 공신’이 될 수 있거든요.”

오는 12월31일자로 해고통보를 받은 한국지엠 경남 창원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 ㄱ씨(50)는 싸늘한 농담을 던졌다. 그는 1992년 대우자동차 시절 이 공장에 입사해 27년을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그의 작업복 어깨에는 하얀 줄이 그어져 있다. 그가 비정규직이라는 표식이다.

ㄱ씨는 “처음 입사했을 때 정규직은 회색 작업복, 우리는 황토색 작업복이라 창피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작업복이 보여주는 차별은 다른 문제와 비교하면 사실 그에게 별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이 한국지엠에서 살기 고달픈 진짜 이유는 잊을 만하면 불어오는 칼바람과 “간당간당한 목숨” 때문이다. 한국지엠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비정규직 1000명을 자르고, 2015년에는 군산공장에서 또 1000명의 비정규직을 해고했다.

그리고 현재 창원공장에는 주야간 2교대 근무를 주간 1교대로 전환하기 위해 비정규직 560명을 해고하겠다는 최후통첩이 왔다. 반평생을 이 공장의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그에게 해고위기는 이제 낯설지도 않다. 이번이 벌써 3번째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맡기 까다로운 물류 공정을 담당해 매번 ‘나는 아니겠지’하며 마음 졸여온 그였지만, “이번에는 진짜 나가라는 것 같다”고 했다. 장차 계획에 대해 묻자 “실업급여 받으면서 몇달 쉬다가…, 지금 당장은 모르겠다”고 했다.

ㄱ씨가 알지 못한 미래는, 지엠 군산공장의 ‘과거’와 인천 부평공장의 ‘오늘’일 수 있다. 부평 2공장 비정규직들은 올 초부터 순환휴직에 들어갔다. 지난해 노사는 2공장 가동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주간 1교대제 전환에 합의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무급 순환휴직과 퇴사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2006년부터 이 공장의 도장부 스프레이 공정에서 일했던 비정규직 ㄴ씨(47)는 순환휴직을 택했다. 홀수달엔 공장에 나오고, 짝수달엔 무급휴직을 했다. 그는 월급이 나오지 않는 짝수달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다. 올해 마지막 홀수달, 마지막 토요일인 11월29일, 아침부터 구토 증상을 보이던 ㄴ씨는 공장 휴게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끝내 숨을 거둔 ㄴ씨의 사인은 허혈성 심근경색이었다.

유족과 동료의 말을 종합하면, ㄴ씨의 순환휴직은 순조롭지 않았다. 처음으로 휴직이 시작된 지난 2월부터 일을 찾아 나섰다. 한국지엠 사내하청업체에 적을 두고 있는 상황에서 4대 보험 중복 납부를 우려했기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좁았다. 첫 두 달간은 4대 보험이 없는 ‘쿠팡맨’으로 일했다. 하지만 ㄴ씨의 경차에는 많은 택배 상자를 넣을 수 없었다. 하나라도 더 나르기 위해 부인이 운전을 돕기도 했지만, 기름값을 떼고 나면 생활이 어려웠다. 여름 직전에는 일용직으로 학교 기숙사 등을 돌며 소독하는 일도 했다.

초여름부터는 경기도 이천 물류센터에서 택배 소포 등을 분류하는 일을 시작했다. 인천에서 이천까지 출퇴근하려면 집에서 새벽 4시반에 출발해야 했다. 무거운 걸 나르다 팔꿈치에 염증이 생겨 고생깨나 했지만 ㄴ씨는 그 일을 좋아했다. 부평 2공장에서 자신처럼 순환휴직 중인 반가운 얼굴을 여럿 만났기 때문이다. ㄴ씨는 집에 돌아와 “거기 가니 말동무할 사람도 있고 혼자 밥 안 먹어도 돼서 좋다”고 했다.

1년 동안 공장을 가는 홀수달과 물류센터에 가는 짝수달로 나뉜 두 가지 인생을 살았다. 공장에 가는 달은 다음달 보름에나 월급이 들어와 생활에 쪼들렸다. 최근 ㄴ씨는 친누나에게 “내년부터 매달 2만원씩 갚겠다”며 200만원을 빌리기도 했다. 하루는 아내에게 “지금 공장 권고사직되면 3000만원 준다는데 그거 받고 뭐라도 해볼까”라고 농담처럼 묻기도 했다. “힘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답했던 ㄴ씨 부인은 지금 “그냥 그만두라고 할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고, 다른 기술도 없는 ㄴ씨가 십수년을 일해 온 공장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ㄴ씨는 공장에 가는 홀수달을 언제나 기다렸다고 한다. 11월 한 달간 ㄴ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말 없이 일했고, 일주일에 2번은 2시간씩 잔업도 했다. 11월 말에는 짝수달인 12월에도 공장에 출근해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들뜬 마음으로 지냈다. 그는 11월29일 출근하면서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 “아빠 퇴근하면 같이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했지만 끝내 퇴근하지 못했다. 부인은 “아이 머리가 아직도 더벅머리다”라며 울었다.

군산공장 폐쇄 후 언제라도 한국시장에서 철수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한국지엠에 정부는 8100억원을 지원했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켜야 할 일자리에 비정규직을 위한 자리는 없다. 구조조정을 해서라도 ‘일자리’를 지키겠다는 한국지엠의 역설을, 비정규직들이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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