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50년](13)중국의 참전과정(상)

2000.08.0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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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전쟁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대만을 점령한 뒤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겠다는 그들의 원대한 계획이 6·25에 의해 좌절됐기 때문이다. 서둘러 참전했다가 70여만명의 인명 손실을 입은 것도 엄청난 타격이었다. 본지가 중국·러시아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중국은 1951년 대만을 해방시킨 뒤 조선통일 문제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수상이 소련 스탈린 원수의 동의를 얻어내는 바람에 대만 해방계획을 무기한 연기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일성 수상이 1950년 5월, 중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조선 통일’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 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동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5월13일부터 16일까지 3차례 마오 주석과 만났다.

중국 공산당 핵심부의 집무실과 관저가 몰려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의 회의실 화이런탕(懷仁堂). 5월13일 밤, 마오 주석을 만난 김 수상은 “마오 주석 동지, 남조선인민들이 조국통일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선 통일의 기회가 다가왔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이에 대해 마오 주석은 “귀측 대사가 이미 여러차례 내게 와서 그 문제를 거론했소. 그래서 지금은 곤란하다는 말을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당시 중국은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도하 장비를 들여오고 있었다. 이듬해인 51년 대만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이미 세워놓았던 것이다.

마오 주석은 일단 회담을 중단하고 주중 소련대사 로신을 급히 불러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김수상 발언에 대해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튿날인 14일, 로신 대사는 스탈린의 전보를 마오 주석에게 전했다. “마오쩌둥 동지. 조선동지와의 대화중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정세가 바뀌어 조선인들이 통일을 하겠다는 건의에 동의했소. 물론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중국 동지와 조선 동지들이 함께 결정해야 하오. 중국동지들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의 해결은 늦춰질 것이오”

마오 주석은 어쩔 수 없었다. 국제공산주의의 맏형격인 모스크바가 분명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15일 김수상과 또다시 만났다. “대만을 해방한 뒤 조선문제를 해결하면 중국은 더 많은 지원을 북조선에 할 수 있소. 그러나 조선문제가 이미 모스크바의 승인을 얻은 만큼 나도 동의하겠소”.

김수상은 3단계 계획을 설명했다. 1단계는 병력과 장비를 확충하고 2단계는 남쪽에 통일방안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3단계로 무력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겠다는 복안이었다. 마오 주석이 우려한 것은 일본군이나 미군의 참전 가능성이었다. 이에 대해 김수상은 거침이 없었다. “일본군 2만~3만명이 와도 대세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미군의 참전은 정황에 비춰 볼 때 거의 불가능합니다. 스탈린 동지도 미국 등이 간섭할 때는 지났다고 했습니다”

“속단하기는 이르오. 나름대로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오. 미국이 간섭하지 않으면 방애물은 없소. 미국이 개입을 하고도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38선을 넘으면 우리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오”

김수상은 16일 마오 주석과 마지막 회담을 갖고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앞서 7월초 중국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 병력을 국경 지방에 배치하라. 소련은 전투기 지원을 맡겠다’는 스탈린의 권고에 따라 해방군 전략예비대인 제13병단(군사령부 규모) 예하 4개군(우리의 군단 규모)을 신의주와 마주 보는 단둥(丹東)에 파견, 미군을 가상적으로 하는 훈련을 하도록 했다. 10월1일 새벽 2시50분, 스탈린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김수상의 지원요청 편지를 받았다. 스탈린은 편지를 읽자마자 주중 소련대사를 통해 마오 주석에게 “5~6개 사단을 신속하게 38선으로 보내 북조선을 도와주라”는 전보를 보냈다. 시차와 중간 전달 과정 등의 이유로 스탈린의 전보가 로신 소련대사를 거쳐 마오 주석에게 전달됐을 때는 이미 그날 정오가 넘었다.

거의 동시에 북한의 박헌영 부수상이 지원요청을 담은 김수상의 편지를 직접 들고 중난하이에 도착했다. 밤을 꼬박 새운 철야 회의 결과 중국은 10월2일 군대를 보내 북한을 도와주기로 ‘일단’ 결정했다. 마오 주석은 “지원군의 이름으로 일부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의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보를 썼지만 실제로는 보내지 않았다. 중국 권력핵심부가 참전 문제에 대해 의견통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을 제외한 참석자 대다수가 북한의 급박한 사정은 알겠지만 건국한 지 겨우 1년(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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