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프리즘]‘하키투혼, 잊지만 말아주세요’

2000.10.01 18:55

프로축구 성남의 홈구장이 된 성남종합운동장 입구에는 지금도 빛바랜 동판이 붙어있다.

1988년 한국 여자하키가 은메달 쾌거를 이룬 뒤 붙여놓은 기념판이다. 그러나 지금 그 동판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 어디 다른 사람들 뿐이랴. 하키선수들 역시 이제는 그 동판마저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처지다. 불과 2년전까지도 하키선수들의 보금자리였는데…. 프로축구팀을 유치하려는 성남시의 계획에 따라 하키선수들은 바로 곁에 있는 낡고 허름한 보조구장으로 쫓겨갔다. 가슴에 맺힌 한을 가득 담은 하키선수들은 한국통신 연습장이나 김해 하키장 등을 전전하며 올림픽 메달의 꿈을 불태웠다.

그리고 2000년 9월30일. 남자하키가 세계최강 네덜란드와 접전을 벌이며 올림픽 은메달의 소원을 이룬 날. 네덜란드 기자가 찾아왔다. 한국의 실업팀이 단 3개라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믿을 수 없다고….

국내언론이나 반응도 비인기 설움 속에서도 세계정상권에 오른 남자하키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과 하키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잔잔한 감동을 뿌렸다.

이제 나올 말은 뻔하다. 그들의 성과에 감화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열악한 처지에 동정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힘있는 사람마다 ‘실업팀을 만들어 준다’ ‘하키 전용구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 법석을 떨 것이다. 그러나 하키인들은 믿지 않는다. 여자하키가 88·96년 올림픽에서 은메달의 쾌거를 이뤘는데 무엇이 달라졌나. 예전처럼 남자하키의 쾌거도 며칠만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키장을 찾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릴 잊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 우린 또 일을 낼 겁니다”. 어느 하키인의 눈물섞인 호소는 또한번 공허한 메아리로 허공을 돌아다닐 것이다.

〈시드니/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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