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불속불]신대륙발견, 유럽인은 우월한가?

2000.11.01 17:12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앤서니 그래프턴·일빛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시작된 시점이라고까지 불리는 신대륙의 발견. 이것은 흔히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것을 실감한 계기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원제 ‘New Worlds, Ancient Texts’, 서성철 옮김)은 오히려 신대륙의 발견이 유럽인에게 자신들의 지적 전통이 얼마나 얄팍하고 천박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해준 계기였음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유럽에서 지적 전통은 사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과 성서라는 텍스트에 근거했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이란 진부한 것이었다.

미국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인 저자(Anthonay Grafton)는 유럽이 소위 근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때는 신대륙이라는 뜻밖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지적 한계를 깨달았을 때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신대륙은 당시 유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충격이었다. 요즘 영화에 자주 나타나듯 미지의 혜성·생물체들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일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은 ‘발견’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의 사고체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다. 따라서 신대륙 발견 이후 한동안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유럽 사람들의 케케묵은 사고방식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책의 181쪽에 나오는 그림을 보자. 창 밖으로는 돌로 만들어진 중세 유럽풍의 성채가 보인다. 르네상스 양식의 원주로 장식된 실내 바닥에는 체스판 모양의 대리석이 깔려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종교재판에 사용되던 잔인한 고문이 행해진다.

이것은 ‘아메리카’(1596년)라는 책에서 그리고 있는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의 처형장면이다. 황제를 배신한 피사로는 마치 그리스 석상들과 흡사한 모습을 한 인디오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황제를 죽이게 한다. 무대는 16세기 잉카제국이지만 모든 게 르네상스 유럽의 모습이다. 상상과 현실이 혼재된 이 그림은 당시 유럽 사람들의 신대륙에 대한 무지와 상상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부정하는 과정은 새로운 지식인 집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과거의 고루한 학자들이 아닌 실제적 경험을 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지식과 현실적인 세계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당시의 많은 문헌·그림들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생생히 재현한다. 새로운 동·식물, 질병, 나아가 아이디어들은 500년전 문명의 충돌 과정·결과의 생생한 증거물들이다. 그리고 그런 충돌과정을 겪고서야 새로운 유럽이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사실 ‘신대륙’이란 말은 지극히 유럽 중심적 시각을 투영하는 말이다. 이 때문에 시정돼야 마땅한 용어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유럽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 신대륙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하지만 편파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낯선 두 문명의 조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가 풀어내는 심오하고도 폭넓은 역사적 성찰은 소위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타 문화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필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설혜심·연세대 강사·서양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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