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특별한 만남’주한영국대사관저

2001.11.01 16:49

추색이 완연한 계절. 서울시내에서 ‘가장 걷고 싶은 거리’로 꼽히는 정동 덕수궁 돌담길에는 만추를 음미하려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 정동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건물인 정동교회를 비롯해 1896년 아관파천의 배경이 된 러시아공사관, 1922년 착공된 로마네스크양식의 성공회 성당 등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지켜본 건물들이 많다.

서울 중구 정동 4번지. 덕수궁과 성공회 성당 사이에 위치한 주한 영국 대사관에도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숨겨진 건물이 있다. 일반인들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대사관저가 바로 그것. 태평로 쪽으로 난 대사관 정문을 지나면 대사관 건물이 나오고 이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드넓은 정원 위로 고풍스러운 벽돌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1883년 우리나라와 우호통상 항해조약을 맺은 이듬해 영국은 서울에 총영사관을 설치했고 이 대사관저는 1890년 완공되었다.

푸른 잔디 언덕 위에 자리한 2층짜리 벽돌집. 붉은 벽돌을 쌓고 흑벽돌로 문양을 낸 건물 상부에는 1890이라는 완공연도 표기가 선명하다. 정면 4칸 규모의 빅토리아 양식의 건축물. 기둥과 기둥 사이의 비례가 균형감이 있고 아치가 멋스럽다. 이 저택에서 지난해 8월 부임한 찰스 험프리 영국대사와 에니드 험프리 대사부인이 살고 있다.

서쪽 현관으로 들어서면 서재와 응접실 사이 복도에 지난달 초 기획된 ‘영국저택’이라는 전시물의 일부인 카펫이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영국에서 수학한 젊은 우리 작가 4명이 주축이 돼 기획했다. 에니드 험프리 대사부인은 “작품이 마음에 들어 아직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춤추는 남녀의 사진을 오려붙인 벽지와 패션잡지를 오려낸 조각들로 연결된 카펫이 재미나다. 벽면 곳곳에 걸린 그림과 조각품이 눈길을 끈다. 1층에는 두개의 응접실과 서재, 부엌, 식당이 자리하고 2층에는 세개의 침실이 있다. 두개의 응접실은 가운데 접이문을 둬 파티 등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넓게 쓸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초록색 꽃무늬 커튼으로 포인트를 준 응접실에는 우리나라의 고가구와 일본의 옛 도자기, 영국작가의 조각품, 대사부인의 할머니가 결혼선물로 받은 도자기 등이 어우러져 있다.

건축된 지 111년이 되었건만 대사관저는 초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벽난로 옆 화려한 나무장식도 원형 그대로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잠깐 대사관저를 점령했을 때에도 창문과 문을 제외하고는 큰 파손을 입지 않았다. 식당은 이 집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곳. 잘 가꿔진 정원이 한눈에 보인다. 바람이 불 때면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장관이다.

널따란 정원은 이 집의 자랑이다. 대사부인에 따르면 정원 역시 예전 모습 그대로다. “몇해 전 1930년대에 이곳에서 근무하던 대사의 손녀가 사업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지금 모습을 찍으러 왔다며 옛날 사진을 갖고 왔는데 그 모습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란 적도 있습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곳곳에는 아직도 장미가 만발하다. 몇걸음만 나가면 자동차 소음으로 시끄러운 곳인데도 정원은 조용하고 여유로움이 넘친다. 한아름도 더 되는 버드나무는 아직도 푸릇푸릇하고 은행나무,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등 수종도 다양하다. 3년 전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방한했을 때 심은 벚나무도 정원 한쪽에서 자라고 있다.

주한 영국대사관저는 타 대사관저에 비해 문화행사가 자주 열려 방문객이 많다. 지난해에도 9,000여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집이 오래돼 입주한 이후 계속 냉난방시설을 보수하고 페인트칠을 다시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대사부인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영국인의 삶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며 관저를 개방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영국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매년 테니스대회가 열리는 런던 근교의 윔블던에서 살았다는 험프리 대사부인은 영국인들은 새로 집을 짓기보다는 오래된 집에서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오래된 집들이 좀 더 특색있고 공간이 넓어서 사용하기 좋거든요”

서울 도심에 숨겨진 고풍스러운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 그 속에 역사가 살아숨쉬고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윤민용기자 artemi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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