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멸치

2004.09.01 15:48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문학수첩’ 가을호

살면서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끝내 다 주고 떠나는 생은 아름답다. ‘바다 속 다시마 숲’을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다가,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약소어족(弱少魚族) 멸치. 뼈 속까지 우려내서 인간에게 보시했으니 별이 되어 다시 뜨고, 핏빛 동백꽃으로 다시 피었으리라. 오늘, 청한 가을바다 속에서 한 무리의 멸치들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것이다. 붉은 산호초가 예쁘게 피었다면서 기웃하고, 저녁 노을이 무척 아름답다며 기웃할 것이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고, 뉘집 아이는 산호초 밑에서 통 나오질 않는다며 쏙닥거릴 것이다. 어느 빛좋은 가을날, 어부의 그물에 걸려 건조장 채반에 줄지어 누워서도 ‘나의 한 시절은 참 아름다웠노라’고 노래하는 멸치, 멸치라고.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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