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언더우드의 기도

2004.11.01 17:34

호레이스 H 언더우드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5년이었다. 그 해 스물다섯살의 이 청년은 막 만들어진 서양식 병원 학교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그루터기] 언더우드의 기도

그로부터 30년 후, 언더우드는 사촌형 존 언더우드로부터 거금을 희사 받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다.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들어가고 말았지만, 그는 이 밑 모를 투자에 힘을 다했다. 연희전문을 설립한 이듬해, 그러니까 1916년, 그는 이 학교의 후원금을 모으러 미국으로 갔으나, 이미 몸에는 큰 병이 번져 있었고, 결국 그 때문에 숨을 거두었다.

언더우드가 서울에 도착한 지 몇 년 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기도문을 한 장 읽게 되었다. 기도문은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이라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차라리 냉정한 당시 조선에 대한 관찰이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니, 열악한 환경을 탓할 곳도 마땅치 않을 터에, 언더우드는 조선의 마음을 찾으려고 자신의 생애를 걸었다. 그에게 생긴 병은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얻은 암이 아니었던가 추정하고 있다. 학교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협조는커녕 모함과 사기가 더 심했던 모양이다. 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것을 암시하는 구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마르고 가난한 땅’을 향한 애정이 드러나는 구절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광혜원과 연희전문은 지금 연세대학교의 뿌리가 된다. 분명 ‘눈물로 기뻐할’ 만큼 큰 학교가 되어 있다.

지금 연세대는 고교등급제 논란의 한가운데 휩싸여 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입시제도가 크게 바뀌고, 대학의 자율이 늘어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그만한 역사와 경험을 축적한 학교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다만,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던 언더우드의 기도를 잃지 않고 있음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고운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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