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라 “무용 교육은 평생의 사명”

2007.12.20 15:56

대전 무용 지킴이 이미라(77). 해방 직후 다른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박수받을 때 이미라는 무대예술 차원의 무용을 넘어 교육방법론적인 무용에 눈떴다. 무용 인구 확산을 통한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고선 무용예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60년 동안 학교를 기반으로 무용 교육에 전념해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춤과 그들]이미라 “무용 교육은 평생의 사명”

이미라는 1995년부터 유네스코 대전·충남협회 회장으로 바삐 지내고 있다. 지난 10월26~27일 대전에서 250여명의 회원들이 참가한 ‘2007 한국유네스코 운동전국대회’를 개최한 그는 기자에게 이번 행사를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회원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경도 어투로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그는 대전 중구 문화원 3층 유네스코 사무실과 홀로 사는 25평대 아파트를 매일 출퇴근하며 가는 세월을 잊고 산다. 기자는 대전 시내 유네스코 사무실과 계룡의 아파트를 방문, 이미라의 하루를 그대로 추적하고 그의 적극적인 삶을 상상해본다. 2003년 이사한 아파트 거실에는 이불만큼 커다란 벽 거울이 집주인의 출신 성분(?)을 가늠케 한다. 거실과 방마다 걸려있는 가족사진도 따뜻하다. 이미라의 큰딸은 한국무용가 김운미(50·한양대 교수), 작은딸도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현미(40)다. 거실 장롱 문을 여니 이미라가 펼쳤던 각종 공연 프로그램과 100여개의 공연녹화 테이프가 그의 성격대로 가지런히 쌓여있다.

#교사로 활동하며 최승희의 제자가 되다

이미라는 1930년 함흥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20년 만에 낳은 아기 미라를 애지중지했다. 완고한 부모였지만 쉰살 넘어 얻은 딸이기에 딸이 춤추는 걸 만류하지 않았다.

춤은 43년 함흥 집 옆에 사는 장홍심에게 배웠다. 진주검무와 살풀이가 주력 상품. 초등학교 교사가 된 그는 47년 여름방학 때부터 3년 동안 방학만 되면 평양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원래 연구생들을 대상으로 2명의 무용 유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혔지만 부모의 반대로 국비 장학금을 포기해야 했다. 최승희 무용단의 러시아 공연도 부모가 ‘네가 교사지, 기생이냐’고 반대해, 포기했다. 결국 학교를 출근하며 방학 때만 최승희 춤을 배웠다. 평양발레연구소에서 2년 동안 발레도 배웠다.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함흥 함남체육대학 1기생으로 교육무용 석사학위를 땄습니다. 그후 바로 6·25전쟁이 났고 저는 국군위문공연 후 그해 12월 함남부두에서 남하하는 마지막 배를 타고 피란했습니다. ‘길어도 1주일만 넘기면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싶었는데 그게 가족들과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가방 하나만 들고 남하했는데, 38선이 제 희망과 미래를 빼앗아갔습니다. 남북이 가로막힌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부산으로 내려가 3~4년 동안 중·고등학교 강사와 교원강습시키는 강사로 지냈다. 이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교직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북에서 온 사람들 대부분이 따돌림당했지만 그는 교사라서 그렇지 않았다.

#대전에서 교육 무용의 둥지를 틀다

그런데 왜 대전에 자리를 잡았을까.

[춤과 그들]이미라 “무용 교육은 평생의 사명”

“경남 중·고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56년 대전에 정착했습니다. 서울로 이주하는 도중 계룡산에 들러 기도하다 대전에 주저앉았어요. 부모님이 기도 끝에 저를 낳아서인지 저도 산을 비롯해 기도하고 싶은 공간에 관심이 많거든요. 계룡산 옆의 대전이 좋더라고요.”

최승희에게 배운 신무용과 인도춤, 장홍심에게 사사한 전통무용, 학교에서 배운 현대무용 등 다양한 무용을 바탕으로 대전에서 교육 무용극을 시작했다. 교사 이미라가 무용가 이미라로 알려지게 된 해였다.

첫 무용극은 58년 초연된 ‘금수강산’. 민족성과 애국심을 강조한 춤이었다. 60년에는 노산 이은상의 작품 ‘이순신 장군’을 무용극으로 창작했다. 그후 무용극 ‘성웅 이순신’ ‘효녀 심청’ ‘모정’ ‘대지의 불’ ‘통일의 염원’ ‘천추 의열 윤봉길’ ‘대한의 딸-열사 유관순’ ‘굴욕의 36년, 광복 50년’ 등 교훈적인 무용극을 안무해왔다. 76년에는 1300년 전의 민속놀이인 ‘산유화가’ 발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춤 교육에 치중했습니다. 58년 지역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첫 무용발표회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경찰 악대가 음악을 반주했죠. 당시 대전에선 무용학원을 설립한다는 자체가 모험이었요. 춤은 기생이나 추는 게 전부라고 여기는 대중을 대상으로 춤 학원을 열었다고 생각해보세요.”

61년 이미라 무용학원을 설립해 2003년까지 운영했다. 74년에는 교장들과 함께 유네스코 한국 대표로 일본과 중국을 방문해 그들에게 한국춤을 비롯해 일본춤, 중국춤 등 무용 작품에 등장하는 각 나라 춤을 안무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안무한 ‘밤길’은 무용가 이미라를 이해하는 키워드. 국립극장에 공연하러온 중국 무용인을 숙소까지 동행한 후 밤새 중국 무용가에게 춤을 배우는 극성을 떨었다. 86년 독립기념관 개관기념 공연인 ‘열사 유관순’도 열정으로 만들었다.

“무용극 ‘열사 유관순’을 연습하는데 몸이 너무 아파 개관 이틀 전에야 독립기념관으로 연습가려했습니다. 그런데 개관 닷새 전에 전기시험을 하다 불이 난 거예요.”

86년 차 사고도 독립기념관 화재 때문에 일어났다. 독립기념관 화재 현장을 둘러본 후 공주로 차(택시)를 돌리는데 택시 운전사가 뒤에서 오던 짐차를 들이받은 것. 이미라가 탄 택시 뒷부분이 트럭의 중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미라의 입에선 피가 흐르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이미라는 육식, 즉 ‘뻘건’ 핏물이 나오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생선 종류와 달걀도 계룡의 아파트로 이사오면서부터 먹지 않는다.

“계룡의 신성함을 존중합니다. 저는 공연을 시작하거나 작품 구상을 할 때 애국열사를 수없이 배출한 계룡산 암용추를 찾아 새벽 기도를 올립니다. 일생 학교 무용 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충효사상을 강조해 왔으니 춤 행사를 앞두고 애국열사들을 찾는 게 도리죠.” 언제나 계룡산 기도를 위해 3일 전부터는 고기를 먹지 않고 심신을 정갈히 한다.

#호랑이 선생님, 현재를 춤추다

[춤과 그들]이미라 “무용 교육은 평생의 사명”

이미라는 춤과 교육에 대한 질문 외에는 답하길 꺼렸다. 함흥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다니며 함흥체육대학원을 졸업하는 등 잘 나가던 과거의 화려한 나날을 자랑하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활동을 굳이 알려하지 마세요.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말하면 무슨 소용있다고!”

남편과 1남2녀를 낳았다. 사업가 남편은 회사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자 3년 동안 화병을 앓다 막내딸이 7살이던 73년 세상을 떴다. 40대 초반의 한창 나이인 그는 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생계를 떠맡아야 하는 가장의 고단함을 한 몸에 껴안고 살았다. 다행히 3남매는 성실하고 튼튼하게 자라주었다. 거실에 걸린 가족 사진을 보니 아이들이 커가는 데도 함께 찍은 사진 속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얼굴은 계속 한 사람이다. 큰딸 김운미 출산 때부터 집안일을 돌봐주던 아주머니와는 지금도 연락하는 사이란다. 수월하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무용 교육에 힘을 다할 수 있었다. 교단에 서며 무용 교육의 거인으로 부상했다.

서울을 오가며 한국무용협회 결성 멤버로 활약도 했다. 동시에 충남무용협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직도 맡았다. 62년부터 17년 동안 한국무용협회 충남지부장, 72년부터 3년 동안 예총 충남지부장으로 활동했고, 95년부터는 유네스코 대전·충남 협회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76년에는 ‘산유화가’를 발굴했고 75~76년 제21~22회 백제 문화제를 대전·공주·부여 등 세 도시가 단합해 치르도록 유도했다.

그는 65년 7월 유네스코 대전·충남협회 설립 후 70년 현 건물로 이주했는데, 50여명의 협회원이 뭉쳐 지역 문화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 협회장은 4년 임기인데 그는 4번째 회장직을 맡았다. 2010년까지 해야 한다. 이번에 큰 행사를 치른 후 다시 연임됐다. 그만두겠다고 기를 써도 회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그는 극성스럽게 교육 사업을 펼치고 있다. 95년부터 교육무용극 경연대회, 96년부터 청소년 외국어 발표대회를 매년 마련하고 있다. 2001년부터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 맥찾기 춤강습회’를 개최, 춤 ‘아리랑’ ‘무궁화’를 가르치고 기체조 등 수련 교육을 진행했다. 그러나 지난 봄까지 21회가 진행된 이 행사는 요즘 지원이 끊겨 계속되지 못하는 실정. 10대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던 유네스코 강당엔 한기만 맴돈다.

“학생들이 유네스코 강당으로 오지 못하는 대신 제가 그들을 찾아갑니다. 정년퇴직했지만, 실제 정년퇴직은 없습니다. 춤 교육밖에 모르니까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는 것이지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하면 안됩니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배어나오는 강직성.

수만명의 제자들을 지도했기에 제자들을 일일이 기억할 순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그를 기억한다. 10대부터 70대 제자까지 대부분 그를 ‘호랑이 선생님’으로 꼽으면서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저를 기억하지 못하세요?’ 확인하며 반갑게 따른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인데 꼬박꼬박 인사하고 자신을 확인시킨다.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무섭게 가르치던 스승의 춤 교육과 투철한 역사성이 점점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꼿꼿한 삶을 강조해 온 노스승. 그에게 ‘후회’라는 단어가 존재할까. “후회요? 이북에 들어가지 못한 거죠! 배낭 하나 메고 남한에 왔는데 그게 끝이었으니! 다시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내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물론 북한 갈 기회가 있었지만, 제가 남하할 때 환갑 지난 분들이었는데 50년이 흐른 지금 살아계시겠어요? 이젠 형제들도 없을 테고….”

수많은 무용극을 안무하고, 그 뜻을 기린 감사장과 공로패를 수없이 받았지만 고향에 두고온 가족들을 생각하면 모든 게 헛되다. 혼잡한 시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버린 아이처럼 꿈꿔야 할 시간을 잃어버렸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잠깐 다니러 온 남한에서 그의 시간은 멈춰있지만 춤을 향한 청춘의 시간은 지금도 푸르다.

〈유인화 선임기자|대전에서 rhew@kyunghyang.com〉

◇이미라 경력

1930년 함흥 출생
58년 이미라 무용연구소 설립, 이미라 무용단 창단, 첫 무용극 ‘금수강산’ 안무
59년 무용극 ‘풍년 우리 농촌’ 안무
60년 무용극 ‘이순신 장군’ 안무
61년 이미라 무용학원 설립
62년 무용극 ‘성웅 이순신’ 안무
62~78년 한국무용협회 충남지부장
75~77년 제9대 예총 충남지부장
75~76년 제21·22회 백제문화제 집행위원장, ‘산유화가’ 발굴·총지도
91년 미국 공연, 동남아 동양화·서예전 초대작가
95년 ‘굴욕의 36년, 광복의 50년’ 공연, 제1회 교육무용극 경연대회 개최

◇시상

충청남도 문화상·충남 교육감상·충남도지사상(65년), 충남도지사상(71·72년), 대전시장상·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76년), 충남도지사 공로상(91년), 엑스포조직위 오명위원장 공로상(93년), 대전광역시장 공로상(95년), 한·중·일 서예전 감사장(96년), 해군본부 감사패(98년), 유네스코 공로상(2000년),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 공로상(2002년), 보훈문화상(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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