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방 “우주를 품은 몸짓, 승천하는 혼의 노래”

2008.01.03 09:42

‘한국춤은 □다’. □속 단어는? 누가 뭐래도 ‘이매방’이다. 한국 춤의 지존 우봉(宇峰) 이매방(81)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승무’와 ‘살풀이춤’ 등 두 종목 인간문화재이다. ‘구한말 이래 변질하지 않은 춤 원형’으로 꼽히며 전통춤을 오롯이 지켜오고 있다. 무대 위에서 팔 하나만 슬쩍 올려도 관객들의 간장이 오그라들고, 흩뿌리는 장삼 자락에는 승천하는 혼의 노래가 담겨 있다. 온 몸으로 추는 만가는 이매방의 전생이 ‘우봉’이라는 아호처럼 우주를 품은 초월신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이매방은 “대한민국 무용인의 70%가 내 제자”라고 하지만, 이매방의 제자에게 간접으로 배우는 무용 전공생들까지 치면 대부분의 한국 무용 전공자들이 그의 제자인 셈이다.

[춤과 그들]이매방 “우주를 품은 몸짓, 승천하는 혼의 노래”

#춤만 추면 안된다. 바느질도 인간문화재급

우봉은 서울 양재동 100평형 복층 빌라에서 조교 백경우씨(40)와 살고 있다. 용인대 교수로 출강하느라 20년 살던 아현동 집을 떠나 10년 전 이곳으로 왔다. 아래층은 살림집, 위층은 매일 오전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연습실이다. 부인 김정수씨(예명 김명자·65)는 부산 무용학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매주 토·일요일에는 서울에 올라와 제자들을 가르친다.

기자가 찾아간 오후에 이매방은 마루에서 제자에게 입힐 연습복을 재단하고 있었다. 베란다를 터서 넓힌 마루 한쪽에 일제 미싱을 비롯, 3대의 재봉틀이 놓여 있다.

“이거, 130년 된 재봉틀이여. 양복점에서 좋은 미싱 사줄 텡게 이 싱거미싱을 달라고 욕심내도 악착같이 지켰어요. 생전 가야 고장이 없응게. 그 옆에 있는 건 약 80년 된 미싱이고… 쩌그 놓인 오바로쿠 미싱꺼정 모다 다섯대구먼. 내 옷은 다 지어 입고 제자들 의상도 다 내가 지어중께. 나(내)가 시방꺼정 만든 의상들을 어찌 이루 다 시겄(세겠)소! 바느질로 인간문화재하라면 쓰겄는디!”

이매방의 바느질 솜씨는 소문대로 얌전하고 정교하다. 앞이 트인 옷을 입은 기자에게 “아그! 안 추워야? 이거이 젤로 좋은 명준디, 후딱 박어줄텡게 목에 감어!” 큰 가위로 우윳빛 명주를 쫙 가른 후 재봉틀에 앉아 순식간에 박음질을 마친다. 이매방표 스카프가 솜사탕처럼 보드랍고 달콤하게 목을 감는다.

‘이런 장면은 예상에 없었는데….’ 시대의 명인이 만든 스카프를 목에 감은 기자,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멋쩍게 묻는다.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후 술·담배를 끊었다. 줄담배에 앉은 자리에서 대형 정종 세 병을 마시던 실력. 공연 직전 분장실에서 한 잔 마시고 흥에 취해 무대에 오르던 그였다. 너무 잘난 재주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해 춤추던, 진한 사투리의 육두문자를 내뱉던, 흠이 되질 않았다. 모든 게 용서됐다.

“제자×이 인간문화재인 나를 이용해 사기를 쳤당게! 하도 분해 펄펄 뛰었는디, 그때 피를 두 번 토하고 병원 가니 위암 초기려! 신문에 그× 이름 꼭 써야 혀!” 기자에게 당시 억울했던 일을 전하면서 제자에 대한 욕설이 이어진다. 바르지 않은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속사포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온갖 욕을 한다. 남들이 갖지 못한 예능을 소유한 만큼 고단함도 더했을까. 자기 의지대로 거침없이 살아왔다.

#하늘이 내린 불덩어리

이매방의 본명은 이규태. 1926년 음력 3월7일 전남 목포에서 이경율과 모친 조병임의 3녀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명의 자녀 중 5남매만 생존했다. 누나가 3명인데, 규태와 20살 차이 나는 큰 누나는 중국 베이징에서 살았다. 형제들은 모두 작고했다. 18세 위인 큰 형 이학길은 중국 만주 다롄에서 운수업을 했는데, 4대의 자가용으로 영업하며 잘 살았다. 막내 규태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잘 살았다.

“엄마가 저를 임신했을 때 꿈인데요. 호미로 밭을 갈고 있는데 저 앞에서 동그란 불덩어리가 굴러와 엄마 치마로 쏙 들어가기에 그 불덩어리를 꽉 안았대요.”

45세에 꿈꾼 아들 태몽. 불덩어리는 이매방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쌀 잡곡 장작나무 등을 파는 상인이었다. 농사도 지었다.

“아버지가 봉건적이셔서 판·검사나 교수하래요. 남자가 무당새끼처럼 왜 춤 추냐고 못마땅해 하셨는데 어머니가 제 편이셨어요. 해방 전 조선에서 춤춘 남자는 나뿐이었어요. 신무용계에선 김진걸·최현·조택원·이인범 등이 추었지만 권번의 순수한 전통춤을 춘 이는 나 하나예요.”

원래 춤의 뿌리는 호남이었다. 그러나 이매방이 1953년 광주에서 첫 개인발표회를 가진 후 영남과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호남의 춤맥은 흐려졌다. 그나마 목포시에서 내년에 이매방 전수관을 건립해 춤맥을 잇는다. 지금도 이매방은 목포 예총 옆 이매방 전수관에 매달 한두 번 내려가 지도하고 나머지 날에는 조교 김정기(36)가 가르친다. 이매방이 거주하는 서울 연습실은 백경우씨가 맡고 있다.

“암수술 후 채식 위주로 먹습니다. 아침 9시에 일어나 내가 담근 오이김치·오이지·채김치·옥파김치 등을 반찬 삼아 밥을 먹지요. 맵거나 짜게 먹지 말라 해서 조금 달게 만들어 먹어요.”

암 초기여서 항암치료도 받지 않았다. 폐와 간은 까딱없단다. 위암수술 1년 후 무대에 설 만큼 강건한 체력. 지난 몇 년 사이 송범·이인범·최현·임성남 등 많은 원로무용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이매방은 세월의 허약함을 느끼면서도 숨이 붙은 동안 춤만 생각한다. 위암수술 후 59~60㎏인 몸무게가 46㎏으로 여위고 허리도 구부정해져 167㎝(이매방의 주장)의 키가 160㎝로 줄었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춤만 생각한다. 공연을 위해 의상 만드는 일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술고래, 담배골초, 따발총, 욕쟁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교육을 받아 ‘한번 한다면 한다’거든요. 하루 세 갑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술을 딱 끊은 거죠.”

#75년 동안 춤만 추다

이매방은 7세부터 춤을 추었다. 할아버지뻘인 이대조가 권번 교사였다. 양동 집 옆에는 조도 출신 기생 함국향이 살고 있어 자연스레 춤을 배웠다. 그 기생의 소개로 목포권번에 입문했다.

[춤과 그들]이매방 “우주를 품은 몸짓, 승천하는 혼의 노래”

이매방의 춤스승은 5명. “그중 스승 진소홍은 조선시대 마지막 미인으로 꼽히는데, 살풀이춤 추는 모습을 보고 왕이 흥분한 나머지 그를 보듬고 손까지 만진거라! 그 여성은 임금이 만진 손을 명주수건으로 감았대요. 그런데 그 이를 짝사랑한 이가 신무용의 거두인 조택원이에요.”

또 이매방은 무안 출신 이대조에게 승무 검무 장구춤을, 전남 옥과 출신 신방초에게는 육자배기·화초사거리·가곡·가사·승무·검무·보렴승무 등을 사사했다. 오수암에게는 소리를 배웠다. 일곱 살부터 열여덟까지 10년 동안 권번기생들 틈에서 춤을 배웠다. 13~14살에 전남 광주 권번의 박영구선생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전남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 등을 사사했다. 소학교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은 큰 형이 사업하던 만주 다롄과 베이징 누나집을 오가며 중국의 경극스타 매란방을 만나기도 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목포에서 춤과 악기를 배웠다.

매란방의 장검무를 배워 처음 무대에 오른 게 열네살. 목포역전 가설무대에서 열린 임방울의 명인명창대회 공연에서 승무를 추었다. “목포 사는 여자 선배 박봉선(명창 박초선의 언니)의 춤으로 막을 올려야 하는데 그가 광주에서 못와 제가 대타로 추었죠. 그런데 관객들이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네!’ 하고 놀라더군요. 제 춤이 예쁘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그래겠죠.”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결혼은 42세에 부산에서 했다. 목포 사람이 웬 부산? 68년 10월 일본 공연 후 일본에서 술 먹고 2층 화장실에 가다 계단에서 구른 그는 움직일 수가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후에 배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일본 순회 공연에는 고복수·김정구 등 인기가수들이 일본순회공연에 함께 했는데 그들과 술을 마시다 부상 당한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려는데 바로 위 누나가 중매하겠다며 ‘나 죽는 꼴 볼래, 결혼할래’ 협박하대요. 누님 때문에 억지 결혼했습니다.”

부인 김정수는 이매방 춤을 지키고 계승하는 최우선에 서있다. 한성여대를 졸업한 무남독녀 이현주(35)가 부친의 춤을 잇는다. 현재 전수조교는 김묘선·임이조·김정녀 등 세 사람. “문화재는 원형을 보존해야 혀. 집사람만이 내 춤을 변형시키지 않아요. 다른 제자들은 맘대로 창작가락 넣고 별×× 다하는데. 요즘 엉터리 문화재가 너무 많아. 우리나라처럼 인간문화재 많은 나라가 없어요. 모두 문화재병에 걸렸다니까요. 음악이 민속악이면 민속악, 궁중악이면 궁중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야 하는데 처음에 궁중악을 연주하다 나중에 민속악으로 가고 다시 나중에 사물놀이 타악이 나오니 뭔 춤이 그러냐고! 문화재는 우리 역사인디! 무형문화재는 엉터리가 많탕께!”

그는 또 춤을 추려면 무엇보다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춤은 고운 심성에서 우러난 수묵화라는 것.

“맴(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운겨. 맴이 고와야 노래가 곱고 얼굴도 곱당게. 춤 배우면서도 머리 굴리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원! 승무나 살풀이춤도 이수 시험 받을 때까지는 열심히 허고 이수증 받으면 그 길로 끝인거라!”

그의 춤 철학은 의외로 단순하다. 춤을 보며 ‘오매! 요염한 거!’ 하는 탄성이 나오면 최고 명무란다.

옷 만들 때든 춤출 때든 한 가지에만 몰두한다. 그 때 다른 건 모두 잊는다. 죽을 때까지 춤출 것이다. 내년에 평양공연이 예정돼 있다. 미국 뉴욕, 중국 베이징 선양 공연도 있다. 매년 4~5회 대형 무대를 갖는다.

“10년 전 프랑스에서 훈장 받은 게 기억 납니다. 순금덩어리를 주더라고요. 수상기념 공연에 김종필씨가 왔는데 ‘한국 정부가 주어야 할 상을 프랑스가 먼저 주었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한국보다 외국에서 제 춤이 더 인정 받는다는 건 씁쓸하죠.”

60년대 3고(鼓)부터 11고까지 북춤을 창작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은 이매방.

“북의 변죽(둘레)과 구례(가운데)를 잘 구별해 쳐야 합니다. 북에도 대음·소음 등 음양이 있어요. 장구도 마찬가지고. 요즘은 장구를 제대로 치는 이가 없으니. 다른 이들이 내가 친 장구와 북소리를 녹음해 춤출 때 사용하는 이유가 뭐게요. 나는 시절 잘 만나서 좋은 스승을 사사했죠. 우리 제자들에게도 나 살아있을 때 장구 배우라고 잔소리하지만….”

기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겠냐고. 따발총 명인이 얼른 답한다.

“춤추는 사람! 지금처럼 남자 무용가!” 우문명답이다.

▲이매방 약력

[춤과 그들]이매방 “우주를 품은 몸짓, 승천하는 혼의 노래”

1927년 전남 목포 출생
34년 목포 북교 입학
35~39년 만주 다롄 거주. 이대조에게 승무 북춤, 박영구에게 승무 법고, 이창조에게 검무 사사
43년 목포 공립공업학교 졸업
48년 명창 임방울 명인명창대회에서 ‘승무’로 첫 무대
53년 제1회 개인발표회(광주)
56년 제3회 개인발표회(부산)
59년 제5회 개인발표회(서울 원각사)
84년 무용 인생 50년 특별공연 ‘북소리’
87년 승무 예능보유자 지정
90년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지정
93년 인간문화재진흥회 부회장
96년 용인대 무용학과 대우교수
99년 우봉 이매방 춤 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
2004년 외길 인생 우봉 이매방 춤 인생 70년 기념공연

수상 부산시 눌원문화상(76년), 옥관문화훈장(84년), 성옥문화상(9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98년), 임방울 국악상(2004년)

〈시리즈 끝〉

〈사진 이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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