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개 이승현 “노숙자에, 지렁이까지 잡아봤어요”

2008.05.07 13:57

음반내고 다시 컴백 … 70년대 청춘스타의 드라마틱한 인생

시간은 장난꾸러기 소년을 눈가에 주름이 지고 배가 나온 중년의 아저씨로 만들어버렸다. 비음 섞인 목소리만은 그대로였지만 인터뷰 중간 스치는 회한 어린 표정에서 그간 지내온 세월의 신산이 묻어났다. 1970년대 하이틴 스타였던 배우 이승현(47). 오랜 세월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가 최근 ‘잘 될거야’라는 타이틀 곡을 가진 음반을 내고 공식 컴백을 선언했다. 때마침 그의 히트작인 ‘고교얄개’(1976)가 지난 4일부터 서대문의 한 극장에서 재상영되면서 복고 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승현은 “지금은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면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이제서야 아버지가 한때 날렸던 배우인 것을 알았다. 나보다 ‘잘될거야’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했다.  |김정근기자

이승현은 “지금은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면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이제서야 아버지가 한때 날렸던 배우인 것을 알았다. 나보다 ‘잘될거야’ 노래를 더 잘 부른다”고 했다. |김정근기자

그는 “이승현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서 재기하고 노래도 냈다. 노래 제목처럼 다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노래를 낸 것은 연기를 다시 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 연예계를 떠나 있으면서도 배우를 하겠다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최근 ‘7080콘서트’에 출연한 순간을 회고하면서 “아 참, 미련은 버릴 수가 없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80년대 중반 돌연 연예계를 떠난 후 캐나다·필리핀·영국으로 12년간 떠돌았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공원에서 노숙도 하고, 접시닦이·지렁이잡이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지렁이를 잡아 팔던 시절의 꿈을 지금도 꾼다. 골프장에서 깡통을 들고서 밤을 세워서 잡았는데, 막노동도 그런 막노동이 없었다”고 했다.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인복이 없어서 그런 건지, 운이 안 따라서 그런 건지…”라면서 ‘허허’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살이 좀 찐 것 같습니다.

“살이라는 게 찌기는 쉬워도 빼는 게 어렵더라고요. 85~86㎏ 나갔는데 80㎏로 뺐습니다. 7~8㎏는 더 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피부도 거무튀튀해진 것 같은데)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예요. 외국에서 고생하면서 얼굴도 타고 살도 그때 쪘습니다. 사람들이 제 얼굴을 보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것이 나타난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엔 분장도 안했어요. 뽀얘서….”

-원래 가수가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대중한테 가까이 다가가려는 겁니다. 20여년 가까이 스크린을 떠나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연기를 한다고 하면, 보는 분들은 ‘이승현이가 다시 연기하는구나’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색다르게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한 끝에 노래를 부르기로 한 거죠. 노래 가사가 굉장히 건전하고, 경쾌하고 신납니다. 그러나 음반은 홍보용이지 판매는 안해요. 제 본업은 연기니까요. 연기는 연기대로 할 계획입니다.”

-반응은 어떻습니까.

“크게 부각된 건 없지만 들어본 분들은 노래가 편하고 듣기 쉽고 좋다고 그래요. 한때는 벅스뮤직에서 인기순위 2위까지 올라갔다고 그래요. (7080콘서트에 출연했을 때 느낌은) 긴장이 되더라고요. 연예계로 복귀한다는 게 마약 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외국에서 12년간 살면서도 언젠가는 한국에 나가서 다시 배우 하겠다는 마음을 버린 적은 없었거든요.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서서 노래를 하다니. 내가 부르면서도 스스로 믿기지 않는 거예요.”

-재개봉한 ‘고교얄개’를 극장에서 봤습니까.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시사회 때 무대인사를 하고 봤어요. 내가 어떻게 저렇게 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기분이 좋았어요.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고, 극장을 찾으신 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다는 생각도 들고. (요즘 젊은 세대가 얄개라는 뜻을 알까요. 인터넷에 ‘얄개의 뜻이 뭔가요’라고 묻는 질문도 있더군요. 세월의 벽을 느끼지 않습니까) 얄개는 ‘얄궂은 개구쟁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애들은 얄개의 뜻이 뭔지 모르죠. 시대가 바뀌었고. 전에는 내가 세상의 최고인 줄 알고, 세상이 나한테 맞춰주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힘든 시절을 겪으면서 내가 세상에 맞춰가면서 적응해야겠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습니까.

“어머님의 친한 친구분이 충무로에서 여관을 하셨는데, 감독님들이 여관에 투숙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작업을 했어요. 제가 그 여관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거기서 데뷔작 감독님 눈에 띈 거에요. (출연작은 얼마나 됩니까) 한 400편 출연했고, 주연작은 150편 정도 됩니다. 73년도에 임권택 감독님의 6·25 전쟁영화 ‘울지않으리’의 주연으로 대종상 특별상도 받았습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건 고교얄개의 히트 때문이죠. 당시 27만명이 들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500~600만명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때 3만명이 들면 성공이고 5만명이 넘으면 돈 번다고 봤으니까요. ‘고교우량아’ ‘고교 거꾸리군 장다리군’ 등 시리즈가 10여편 나왔습니다. 다 흥했지, 망한 건 없었어요. 제 개런티가 100만원이었는데, 작은 집 한 채 값이었어요.”

-80년대 중반 돌연 연기를 그만두고 캐나다로 떠났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86년이었죠. 집안 사정 때문에 그랬어요. 어머님이 음식업을 크게 했는데, 실패했어요. 활동도 저조했고요. 얄개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성인영화에서 저를 불러주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너도 나이 스물여섯인데, 연기생활 접어라’라고 해서 나갔지요. 언론에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나갔어요. (얄개로 스타가 됐다가 얄개로 벽에 부딪힌 셈이네요) 그렇죠. 후회는 없었어요. 어렸을 때 인기를 독차지하다 보니까 나중에 다른 작품을 하는 게 부담이 됐다고나 할까요. 만날 장난꾸러기 역할만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어른이 되고 나서 인기를 얻었으면, 외국에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왜 캐나다였습니까.

“삼촌 친구분이 유학원을 했어요. 그분을 믿고 갔는데, 얼마 안돼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아는 분이라곤 그분밖에 없었는데, 설 곳이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겠네요) 어머니가 사업에 실패하다보니 가진 게 없었어요. 한국 분들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야채 다듬는 일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도 굽고, 호텔에서 밤에 청소도 하고, 식당에서 접시도 닦았습니다. 지렁이잡이도 3~4개월 했습니다. 지렁이가 화장품 중 루주의 원료로 들어간대요. 캐나다에서는 지렁이잡이가 정규직업입니다. 여름에 공원에서 자기도 했고,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 친구 집에서 기거했습니다. 집 생각도 많이 났고 혼자서 울기도 했어요. ‘이승현이 캐나다에서 마약에 중독됐다’는 루머도 돌았죠.”

얄개 이승현 “노숙자에, 지렁이까지 잡아봤어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뭐 하러 여기와서 이 고생을 하나’ ‘돌아가서 재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가봐야 다시 연기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감을 잡았어요. 한국에서 활동이 저조했는데, 외국에 2~3년 있다가 들어가봐야 달라질 게 뭐 있겠느냐는 생각이었죠.”

-캐나다에서 돌아온 이후엔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캐나다에 더 있다가는 폐인이 된다’고 해서 7년 만에 나왔습니다. 93년 10월 말에 한국에 돌아왔다가 어머니가 선교사로 계시는 필리핀으로 갔지요. 필리핀에서는 2년 반을 살았는데, 거기서 집사람을 만났죠. 집사람은 영어공부를 하러 왔고, 나는 어머니하고 살면서 신학교를 다녔고. 필리핀에서 나와서 처가가 있는 대전에서 결혼을 한 뒤에 영국으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영국으로 들어가니까 가족도 따라간 거죠. 거기선 1년 만에 나왔어요. 물가가 비싸고 생활이 힘들어서요. (외국으로 돌면서 난민 같다는 느낌은 없었습니까) 지나고 보니 ‘한국에 붙어 있는 게 그래도 좋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외국에서 고생만 실컷하고.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중에 엄청나게 후회가 됐어요.”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언제입니까.

“97년에 대전에 정착했습니다. 동네에서 ‘얄개만두’라는 가게 하나를 얻었습니다. 내가 시장보고, 만두를 만들고 배달도 했습니다. 우리 만두가 맛있어서 그럭저럭 됐습니다. 공중전화도 팔고, 감식초도 판매했고, 별거 다했습니다. 옥방석이라는 것도 좀 팔아봤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컴백 시도를 한 것으로 압니다.

“물고기가 놀던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영화 쪽으로 많이 기웃거렸어요. 충무로도 나가고. 그런데 사람들이 워낙 바뀌었더라고요. 알던 분들은 나이가 들거나 돌아가시고. 영화사도 찾아갔지만, 연락주겠다고만 하고 소식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몇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스커트속의 드라마’(97)는 제작실장님이 저하고 잘아는 분인데, 연락이 와서 찍었어요. 98년에 ‘블루스’라는 영화에 조폭 보스로 출연했는데, 비중있는 조연이었습니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는데, 영화가 실패해서 크게 빛을 못 봤죠. ‘아티스트’(99)는 감독이 저랑 친했는데 비중 큰 역은 아니었습니다.”

-‘쇠락한 왕년의 배우’의 상실감은 안 들던가요. 예컨대 담배를 끊은 뒤 나타나는 금단증상 같은 거요.

“그런 건 좀 있었죠. 영화에 잠깐씩 출연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았습니까. 사람들한테 한동안 잊혀져있다가 어설프게 영화 몇 편에 잠깐 출연했는데, 한 것 같지도 않고 찝찝했습니다.”

-영화사를 차렸다가 실패하기도 했다는데.

“후배 배우가 충남 아산에서 영화사를 차리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내려갔죠. 하지만 사람을 제대로 못 만나서 4개월 만에 엎어졌어요. 투자를 유치하신다는 분들이 돈을 마련하지 못했어요. 그분들이 처음에 후배를 팔아 모은 돈은 어디 썼는지도 모르고요. 하루인가 이틀을 찍다가 제작비를 더 마련하지 못해서 중단됐죠. 후배와 면도칼을 가지고 한강 둔치에 갔었어요. 손목 그으려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고요. (어려서 스타가 되다보니, 순진했던 것 아닙니까) 세상 물정을 몰랐죠. 배우들이 겉보기엔 화려할지 모르지만 속으로 보면 춥고 배고픈 구석이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지만 지출도 많고, 사기당하는 것도 많고.”

-얄개시리즈를 했던 배우 손창호씨도 제작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뒤 폐인처럼 살다가 98년에 작고했습니다.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법 없이도 살 형이었어요. 후배들 잘 챙겨주고, 연기할 때 화도 안내고. 돌아가시기 전에 병원에 한 번 찾아갔는데, 당뇨에 신부전증으로 폐인이 됐더라고요. 저를 못 알아봤어요. 영화 제작했다가 홀딱 망해서 빚만 지고. 주변에서 이용만 당하다가 돌아가신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말로가 저렇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얼마 전에 납골당에 갔다 왔는데, 꽃 한 송이 없더라고요.”

-음반도 내고, 방송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컴백에 성공했다고 봐도 됩니까.

“2007년에 후배 감독의 소개로 소속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습니다. 올해 초 음반을 내고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 노래가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간간이 나오고, 드라마에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팬카페를 찾은 팬들은 예전 명성을 찾기를 바라지만, 옛날만 하겠습니까. 그저 잘되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고 있는 거죠.”

-구체적인 활동계획은.

“8~9월쯤 ‘얄개시대’라는 뮤지컬에 김정훈씨와 출연하기로 했어요. 최종계약은 안했지만 제작자도 있고, 하는 건 확실해요. 시트콤 출연섭외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내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는 게 꿈입니다. 얄개 이야기를 신세대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요즘 세대와 옛날 세대를 연결시켜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음반 속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언젠가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봤습니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세상 끝에 혼자였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안고 다시 올라서기를 하려 합니다. 아니 다시 다가서기를 하려 합니다.”

<이용욱기자>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