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정령을 위하여

2009.10.01 16:46
이일훈|건축가

[사물과 사람 사이]대나무 정령을 위하여

옛 선비들이 음풍농월하던 정자는 대부분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경치를 감상하는 입장에선 즐거운 일. 하지만 자연을 즐기는 태도의 으뜸은 자연을 훼손치 않는 것. 자연의 풍광을 아낀다면, 좋을수록 더 멀리…, 조심스러운 자세로 정자를 앉혀야 귀품이 있다. 물 좋다고 물에 붙여 짓고, 산 좋다고 산꼭대기에 정자를 앉히는 것은 한마디로 자연에 대한 폭력이다. 명승절경의 바위마다 음각한 옛사람들의 글씨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유다. 아무리 시문이 좋아도 자연에 대한 무례함은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유혹은 질긴 유전자인 모양이다. 목멱산 꼭대기 전망대 난간에는 이름 새긴 자물통이 다닥다닥, 유원지나 관광지 등에는 스프레이 페인트로 갈긴 연인들 이름이 즐비하다. 변치 않을 지조와 절개를 원했는지 대나무 숲에도 새겼다. 대나무는 식물분류상으론 나무이기도 하고 풀이기도 하다. 바꿔보면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묘한 경계다. 사랑의 맹세가 바로 흔들림의 경계 아니던가. 맹세의 허무를 알았는지, 파인 살이 곪았는지 대나무, 그만 죽고 말았다. 이름 새긴 연인들이 저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어떨까.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표시 아무 데나 하지말자. 가윗날 차례 지내고 남은 술, 죽은 대나무의 정령을 위하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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