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의 오아시스, 종로 초미니 동네

2009.11.22 17:36
하응백 문학평론가

서울의 관악구에는 남현동, 봉천동, 신림동 이렇게 단 3개의 동네가 있다. 반면 종로구에는 가회동부터 훈정동까지 무려 77개의 동네가 있다. 종로구의 동네 이름들은 그 자체가 문화 유산이라 할 정도로 사연도 많고 역사도 깊다.

[판]서울 문화의 오아시스, 종로 초미니 동네

탑골공원 뒤 낙원상가에서 종묘 사이의 한 블록에도 운니동(雲尼洞), 묘동(墓洞), 와룡동(臥龍洞), 익선동(翼鮮洞), 권농동(勸農洞), 봉익동(鳳益洞), 낙원동(樂園洞), 돈의동(敦義洞) 등의 동네가 모여 있다. 다 초미니 동네들이다.

몇 발자국 걸어가면 지나가버리는 이 동네들은 사실 서울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동네들이다. 왜냐고? 이곳은 서울 중심가에서 아직 도심 재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무교동이나 청진동이 재개발되어 거대 빌딩들이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지만 이곳은 아직 옛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많은 서민들과 예인들이 이곳에 기대어 살고 있다.

이 지역이 특별히 사랑스러운 이유는 많다. 가장 좋은 것은 서민들을 위한 싸고 맛있는 음식점, 술집들이 이 지역에 밀집해 있다는 점이다. 낙원상가 바로 옆 한 끼에 1500원인 해장국집, 바로 그 옆으로 2000원 하는 북어해장국집, 그 안쪽으로 2500원 하는 설렁탕집이 있다. 이 집은 특히 4000원 하는 정통 평양냉면이 맛있다. 점심 시간에 손님이 오면 ‘허름하지만’, 그리고 ‘합석을 각오해야 하지만’ 이라는 단서를 달고 그 집으로 안내를 하곤 한다. 그 집 냉면 맛없다는 사람, 지금까지는 없었다.

4000원짜리 칼국수 잘하는 집이 세 군데 있는데, 점심시간이면 모두 길게 줄을 서야 한다. 그 외에도 순대국밥집, 아귀찜집, 국수집, 횟집, 부침개집, 목살집 등등 서민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맛집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값이 싸다고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음식점이나 술집들은 이 동네 특유의 인심과 입담과 스토리가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것이 바로 동네 이름과 더불어 서울 도심의 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기에 좋다는 것이다.

이 동네에는 예인들도 많다. 피카디리 극장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국악로 부근에는 ‘발에 차이는 것이 인간문화재’라 할 정도로 많은 소리꾼과 연주자와 춤꾼이 모여 있다. 때문에 운이 좋다면 술집에서 가끔 국악 고수(高手)들의 소리 한 자락도 엿들을 수 있다.

그저께였던가. 그 동네에서 한잔 하는 와중에 한 고수(鼓手)의 ‘명기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전설의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불렀다는 ‘명기명창’은 산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산다는 내용의 단가다. 그 고수의 소리에는 소리꾼이 아님에도 남도 특유의 구성짐과 호방함 그리고 한이 서려있었다. 천석꾼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그 소리는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막내아들’인 고수에게 이어져,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고수는 장구의 대가인 KBS 국악단장 최우칠 선생이었다. 고수의 장구소리가 아니라 목소리도 듣고 느낄 수 있는 동네가 바로 그 동네다.

혹 시간이 남으면 주머니에 몇만원을 넣고 친한 친구 서너 명과 그 동네의 술집을 기웃거려 보시라. 쭉쭉빵빵의 미인은 없을지라도 자부심 있는 분야별 문화 전문가들을 수두룩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살풀이의 춤사위나 청성곡 한 자락, 창부타령이나 쑥대머리 한 꼭지 정도는 들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서울역 노숙자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적으로 무장한 멋있는 노숙자라도 만날 수 있다. 이 동네들만큼은 재개발되지 않고 서울의 명물로 인사동과 북촌마을과 연계되어 오래도록 보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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